고려군과 후백제군이 맞붙은 공산전투에서 왕건이 견훤에게 포위되어 위태로운 상황에 왕건을 탈출시키기 위해
대신 죽은 위왕대사爲王代死 신숭겸. 평산 신씨는 신숭겸을 시조로 모시는 성씨이다.
신씨는 우리나라에서 열네 번째로 큰 성씨인데 그 중 평산 신씨는 전체 신씨에서 76%를 차지할 정도로 큰 본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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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장절공 신숭겸 ( ? ~ 927 )
왕건을 추대한 원훈공신
평산 신씨의 시조인 신숭겸申嵩謙의 원명은 능산能山이며, 원래 전남 곡성(현 곡성면 목사동현 구룡리, 용산재) 출신이다. 일찍부터 무예를 닦은 후, 강원도 광해주光海州(춘천)로 이거해 살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궁예에게 발탁되어 태봉泰封의 기장騎將(기병 장군)으로 있었다. 무예와 지략이 뛰어났고 특히 활쏘기 재주가 뛰어나 신궁이라 불렸다고 한다.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 년 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능산은 서기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더불어 당시 시중侍中이었던, 왕건에게 거사를 권하여 왕건을 고려 태조로 옹립하였다. 고려개국원훈高麗開國元勳으로, 대장군大將軍(종3품 무관)에 올라, 『고려사1』에는 ‘고려개국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평산 신씨의 유래
역사에서는 능산이 평산 신씨를 하사받게 된 과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느날 왕건이 평주平州(平山)로 사냥을 나가 삼탄三灘을 지날 때 마침 고공을 나는 기러기 떼를 보았다. 왕건이 수행하는 제장諸將에게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 맞히겠는가?” 하고 묻자 그가 맞히겠다고 아뢰었다. 왕건이 그에게 궁시弓矢와 안마鞍馬를 내리며 쏘라고 하자 그는 “몇 번째 기러기를 쏘리까?” 하고 물었다. 왕건이 웃으며 “세 번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쏘라”고 하자 과연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명중시켜 떨어뜨렸다. 왕건이 탄복하고 기러기가 날던 땅 3백결을 하사하고 본관을 평산으로 삼는 신申 성을 사성하였다. 이때 하사받은 땅을 궁위전弓位田이라 하여 대대로 후손들이 지켜왔다.
평산平山은 황해도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대곡군大谷郡 또는 다화실多和悉이었던 것을 신라 경덕왕이 영풍永豊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에 평주平州로 하였고 1272년(원종 13) 부흥군復興郡에 합쳤다가 충렬왕 때 다시 복구하였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평산平山으로 바꾸고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으며, 고종 때 군郡이 되었다.
위왕대사爲王代死와 왕건의 애도
고려태조 10년(927년) 10월, 견훤의 군대가 신라의 경주를 침입하여 경애왕을 살해한다. 급보를 받은 왕건이 직접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군사를 통솔하여 경주로 향하니 두 나라의 군대가 맞닥뜨린 곳이 공산公山 동수棟藪(현 대구 지묘동)지역이다. 처음에는 고려군의 매복공격으로 견훤군이 갈팡질팡하였으나 워낙 수가 많은 후백제군은 점차 수습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왕건군이 포위되어 점점 형세가 위급하게 되었다.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포위망을 뚫을 수 없는 막다른 지경에 이르자 얼굴이 왕건과 흡사한 의제義弟 신숭겸이 왕건을 가장하고 대신 죽을 것을 자청하였다. 그는 태조의 수레(어거御車)에 갈아타고 태조와 갑옷을 바꿔 입고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견훤의 군사는 신숭겸을 태조로 여기고 그 머리를 잘라서 창에 꿰어 달아나니 포위했던 군사가 조금 풀려 태조는 겨우 단신單身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태조가 본진에 돌아와서 곧 신숭겸의 시신을 찾았으나 머리가 없어졌으므로 이를 분간할 수 없었더니 대장 유금필 등이 말하기를 “신장군의 왼발 아래에 사마귀의 무늬가 있었는데 북두칠성과 같았습니다” 하는지라 이를 근거로 과연 찾아내었다. 이에 얼굴을 목공을 시켜 다시 만들어 황금으로 본을 뜨게 하니 생시의 모습과 똑같았다.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히고 자리에 앉게 하여 태조가 친히 제례를 행하고 통곡하였다. 장지는 도선대사가 자신을 위해 잡아준 묘터를 내어주어 예장하게 하였다. 태조는 명을 내려 그가 죽은 자리에 단(순절단殉節壇)을 모으고 절(지묘사智妙寺)를 지어 명복을 빌게 하였다. 왕건은 그에게 ‘벽상호기위 태사 개국공 삼중대광 의경익대 광위이보지절지정공신壁上虎騎衛 太師 開國公 三重大匡 毅景翊戴 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에 추봉하고 장절裝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후 태조가 매양 팔관회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즐거워할 때 전사한 두 장수가 자리에 없음을 애통히 여겨 신숭겸과 김락의 상像을 짚으로 묶어 만들게 하여 조복을 입혀서 반열班列에 따라서 앉게 하였다. 임금이 술과 음식을 내리기를 명하니 술이 문득 닳아 마르고 가상假像(짚으로 만든 상)이 일어나서 춤을 추는 것이 마치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고 한다. 이로부터는 연회를 여는 행사에는 항상 이들의 자리를 만들어 두도록 하였다.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예종 15년(1120)에 왕이 서경에 행차하여 팔관회가 열렸을 때, 김낙과 신숭겸의 가상을 보고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두 장수의 공을 추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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