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서씨는 예부터 선조들이 경기도 이천 서아성徐阿城을 터전으로 살았기 때문에 서씨 성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서씨 중 대표적인 본관으로는 인구가 가장 많은 달성 서씨와, ‘서한’을 원조로 모시고 있는 대구 서씨가 있는데 달성 서씨와 대구 서씨는 조선시대 크게 번성한 명문가이다.
서씨의 연원
달성 서씨와 대구 서씨는 모두 서씨의 종가인 이천利川 서徐씨에서 분관된 성씨이다. 우리나라 서씨의 기원에 대해 전하는 이야기는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여余씨에서 서徐씨로 변성되었다는 주장이다. 단군조선 시대에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추장酋長으로 있었는데 그에게 9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각기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는데 그들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 공을 못 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 하여, 여余자에 중인衆人 변邊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서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둘째 기箕씨에서 서씨가 나왔다는 주장이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의 기록에 따르면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의 지명을 따서 성씨를 서씨라 하였다고 한다.
세째, 왕이 서씨를 사성했다는 기록이다. 「서씨사적정해徐氏史跡精解」에 따르면 기준箕準의 후손인 만주萬周라는 사람이 나이 40살에 사슴의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한다.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그 이야기를 듣고 기특하게 여겨 만주에게 서씨의 성을 내리고 뒤를 보살펴 줌으로 신神의 가호로 안일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이름을 신일神逸로 고쳤다고 한다.
도시조都始祖 서신일徐神逸
이천 서씨와 달성, 대구 서씨의 시조는 서신일徐神逸이다. 그는 신라 헌덕왕 9년에 탄생하여 효공왕 때 벼슬이 아간阿干에 이르렀다.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아우 서신통徐神通과 더불어 경기도 이천利川의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處士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 그는 70이 넘도록 아들이 없자 아우 서신통이 자기 아들로 입사立嗣할 것을 권했으나 동생의 소생을 빼앗아 자식을 삼는 것은 인정에 반하는 것이라 하여 듣지 않고, 제자들의 권유에 따라 재취再娶를 보았다고 한다. 그 뒤 어느 날 사냥꾼에 쫓긴 사슴을 구해 준 일이 있었다.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사슴이 자기 아들이라 하면서 살려준 은혜를 크게 감사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고서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을 낳았는데, 그의 나이 80이 넘어서였다고 한다. 필의 아들이 고려 때 거란을 물리친 유명한 서희徐熙 장군이다.
이천 서씨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서신일)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서한)이라고 했다. 이천과 달성의 서씨는 신라 때 아간대부 서신일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徐命膺이 썼다. 이천 서씨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는 달성達成,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평당平當, 남평南平 등의 서씨가 모두 서신일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참고로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준箕準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淸州 한씨韓氏, 태원太原 선우씨鮮于氏, 행주幸州 기씨奇氏 등이 있다.
달성의 역사
달성達城은 경상북도 최남단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삼한시대에 달구화達句火 또는 달구벌達句伐이라 불렀다.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대구현大丘縣으로 개칭하여 수창군壽昌郡에 속하였다. 조선 영조 때 구丘를 구邱로 고쳐 대구大邱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가지를 이룬 전역이 대구부大邱府로 독립되고, 외곽지 전부와 현풍군을 폐합하여 달성군達城郡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 대구시로 승격할 때 달성군의 가창嘉昌, 성서城西, 월배月背 등의 면이 대구시에 병합되었다. 1995년에 달성군은 경상북도로부터 대구광역시에 이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은 3읍 6면이다. 현재 군청 소재지는 논공읍이고, 다사읍과 화원읍이 있다.
성씨의 변천과정
달성 서씨와 대구 서씨는 한 뿌리
달성 서씨와 대구大丘(대구大邱가 아니고) 서씨는 서신일을 도시조로 하는 동근후손同根後孫이다. 하지만 두 집안은 시조를 달리하며 다른 본관을 쓰고 있다. 이들은 원래 달성 서씨의 향파鄕派와 경파京派였다. 향파는 벼슬을 멀리하며 시골생활을 했고 경파는 서울에 살며 대거 관직에 진출했다. 처음 두 집안은 조선 숙종 28년(1702)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하여 임오보壬午譜를 만들었으나, 의견 충돌로 경파가 단독 족보를 만들어 대구 서씨로 갈라서게 되었다. 달성 서씨 향파鄕派는 고려 봉익대부逢翊大夫, 판도판서判圖判書(조선의 호조판서) 등에 오르면서 나라에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진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의 아들 서기준과 손자 서영까지 3대가 달성군에 봉해졌다. 달성 서씨의 분파로는 현감공파縣監公派, 학유공파學諭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로 나뉘어 있다.
반면 경파는 영조 이후 대구 서씨로 분관했는데 시조는 고려 때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지낸 서한徐閈이다. 대구 서씨는 시조 서한 이후 2~6세의 세계가 실전되었다. 그래서 전객사典客司를 지낸 7세 서익진徐益進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조선의 대문호인 서거정과 약봉藥峯 서성徐渻 이후 가문이 크게 일어나 상신相臣(재상) 9명, 대제학 6명, 왕비 1명을 배출하는 명문거족으로 성장하였다. 분파로는 만사공파晩沙公派, 전첨공파典籤公派, 첨추공파僉樞公派, 도위공파都尉公派, 부봉사공파副奉事公派, 사가공파四佳公派, 서흥파瑞興派, 춘간공파春幹公派,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 장원공파掌苑公派, 훈련봉사공파訓練奉事公派, 배산파 등 12개파가 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달성 서씨는 총 13만 2270가구에 42만 935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달성 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명을 배출하였다. 반면 대구 서씨는 총 7645가구에 2만 2751명으로 파악되었다. 대구 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43명을 배출하였다.
달성 서씨와 대구 서씨는 광산光山 김씨, 연안延安 이씨와 함께 조선 3대 명문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천 서씨가 해주海州 최씨, 남양南陽 홍씨 등과 함께 고려의 명문가로 이름이 높았다면, 달성·대구 서씨는 조선시대를 주름잡은 명문거족이었던 셈이다.
(영상 32분 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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