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吳씨는 중국에서 건너온 귀화성씨로 춘추전국시대 주나라의 제후국인 오吳나라에서 비롯된 성씨다. 주나라 태왕의 아들 오태백이 오나라를 건국한 후 759년 동안 내려오다 멸망하자 후에 자손들이 국호를 성씨로 삼으면서 오吳씨가 시작되었다. 중국의 성씨 순위로는 10위, 우리나라 성씨 순위로는 12위다. 전 세계 오吳씨 종친들은 모두 한 뿌리에서 나온 후손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나라 해주 오씨는 오태백을 뿌리로 하고 있지만 시조와 족보가 다른 두 계통 향파鄕派와 경파京派가 있다. 뿌리는 같지만 서로 고증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 현재로선 어떤 관계인지 알 수가 없다.
해주 오씨의 기원
도래인 오첨 해주 오씨와 그에서 분파된 오씨 대부분이 오첨吳瞻을 시조로 하고 있다. 오첨은 중국으로부터 신라 지증왕 원년(500년)에 신라로 들어와 해남 땅에 이르렀는데 당시 첨사僉使 이상보가 재화와 보물을 빼앗아 숨겼다. 후에 그 사실이 들통나 외국사람이 경내에 들어온 것을 보고하지 않은 죄로 첨사 이상보는 목을 베이고 오첨은 신라에 머무르게 하였다고 한다. 뒤에 왕명으로 함양 김종지金宗之의 딸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낳고 함양에 정착하였다. 오첨은 22년 동안 살다가 태봉의 궁예弓裔 때 후한後漢의 왕이 당唐나라 사람을 쇄환刷還하여 돌아가게 되었을 때 큰 아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돌아간다. 이 때 둘째 아들 응膺이 너무 어려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그대로 우리나라에 남게 되었다. 이후 오응의 12대손 광우光佑가 중국에 들어갔는데, 그의 현손 연총延寵이 문종 때 다시 고려에 건너와 정착했다. 그래서 오연총은 오씨의 중시조가 된다.
중국 오씨의 기원 중국 오씨의 시조는 주태왕周太王 고공단보의 장남인 태백泰伯이라고 한다. 고공단보에게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장자가 태백泰伯, 차자가 중옹仲雍이고 막내가 계력季歷이었다. 계력이 아들 창昌을 낳으니 이분이 후일後日 주문왕周文王이다. 태왕은 창昌이 성덕聖德이 있음을 알고 전위傳位하려하나 태백과 중옹이 있어 말을 못하였더니 태백이 부친의 뜻을 알고 아우 중옹과 함께 멀리 장강長江(양자강)을 건너 형만荊巒에 살았으니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이다. 태백이 머리를 기르고 문신을 하여 지역의 풍속을 바꾸고 자호自號를 구오句吳라고 하였는데 그곳 사람들이 그를 의인義人이라 하여 따르며 군장으로 옹립하였다. 그 지역 이름도 호를 따라 구오가 되었다. 태백에게는 후사後嗣가 없어 동생 중옹이 대를 이었다. 주나라는 계력의 손자 무왕이 상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 때 주무왕은 중옹의 증손자 주장周章이 구오 지역을 다스리고 있음을 알고 그를 오국吳國에 봉하고 태백을 오백吳伯으로 추봉追封하였다. 이 때부터 오나라는 주나라의 제후국이 되었다. 오국시대吳國時代는 희씨姬氏로 고소姑蘇에 도읍하였으니 그 고소姑蘇는 지금의 소주蘇州이다. 그 후 BC 473년 월왕 구천에게 멸망되니 25대 759년이며 그 자손들이 국호로서 성씨를 삼았다고 한다[吳後爲越所滅子孫國號爲姓氏]. 부차 왕의 손자 루양鏤羊이 위후衛候에게서 오의 사성賜姓을 받았다하여 득성시조가 되었다는 설과 루양의 손자 오기吳起에게서부터 오씨를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중국에는 오나라뿐 아니라 초나라에도 오씨가 있는 등, 3가지 계통의 오씨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의 중화 오씨 대종회에서는 태백을 득성시조로 중옹을 대를 이은 시조로 받들고 있다. 해주 오씨 대동종회에 따르면 태백의 25세손이 오기★이고, 오기의 45세손이 오첨이라고 한다.
★오기는 전국시대 초기 위衛나라 사람으로 대략 기원전 440년에 태어나 기원전 38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찍이 노魯·위魏·초楚에서 벼슬하면서 많은 공을 세우고 남다른 업적을 남겼다. 손자와 함께 유명한 군사 전략가이다.
성씨의 변천과정
우리나라 오씨는 「조선씨족통보」에 210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동국만성보」에는 해주海州·보성寶城·동복同福·고창高敞·나주羅州·함양咸陽·군위軍威·낙안樂安·금성錦城·장흥長興·함평咸平 등을 비롯하여 20본이 전한다. 오늘날 오씨는 해주오씨, 보성오씨, 동복오씨의 3본이 전체 오씨 인구(706,900명)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오씨대동보吳氏大同譜』에 의하면 울산·낙안·고창·함평·나주·평해는 해주오씨에서, 군위는 동복오씨에서, 장흥·두원·화순·함양은 보성오씨에서 분적했다고 한다. 해주오씨에는 두 파가 있다. 하나는 신라 지증왕 때 도래한 오첨을 도시조로 삼는 향파鄕派이고 또 하나는 고려 성종 때 중국에서 건너 온 오인유를 시조로 삼는 경파京派이다.
해주 오씨 향파 해주오씨의 시조 오현보吳賢輔는 오씨吳氏의 도시조都始祖인 오첨의 24세손이자, 오씨 중시조인 문양공 오연총의 6세손으로 오수권吳守權의 아들이다. 첨의 11세손 다련군 오희吳禧가 나주에 살며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금성백錦城伯 차남은 수양백首陽伯 삼남은 천령백天領伯으로 봉해졌고 딸 장화왕후壯和王后는 고려 태조의 왕후로서 혜종의 어머니이다. 오첨의 14세손 오광우吳光佑가 족질 우경과 980년에 송나라에 들어가 성도임앙(현 사천성 내)에 살았는데 그의 현손인 오연총吳延寵이 문종 때 다시 고려에 건너와 정착했다. 오연총은 윤관과 함께 부원수로 북변의 여진을 토벌하였으며, 이부, 예부, 병부상서를 역임하였다. 오연총의 5세손인 오수권吳守權은 오현보吳賢輔, 오현좌吳賢佐, 오현필吳賢弼이라는 세 아들을 두었다. 이들 삼형제는 고려를 침입해 온 거란군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각각 해주군海州君, 동복군同福君,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져, 해주오씨, 동복오씨, 보성오씨의 시조가 되었다. 해주군 현보는 1199년에 낭장郎將으로 명주민란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다. 그뒤 상장군에 올랐으며 1224년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참지정사(종2품)로 졸卒하셨다.
해주 오씨 경파 중국 송나라의 학사로 이름이 높았던 오인유吳仁裕가 시조이다. 성종成宗은 고려로 건너온 그가 중국의 제도를 잘 알고 있음을 알고 특별히 진급시켜 군기감과 예부의 일을 맡겼다. 그은 성종7년(1001)에 임금에게 아뢰어 오묘五廟와 사직社稷, 그리고 다음해에는 태묘太廟와 국자감國子監(국립대학)을 세워서 새로운 문화와 국민교화에 힘썼다. 해주에 정착하였기에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삼았다. 해주는 고구려 때는 내미홀內米忽이라 칭하였고 신라 때는 폭지瀑池라 고쳤다. 대대로 내미홀, 지성池城, 장지長池, 서해西海, 안서安西, 수양首陽으로도 불리웠다. 오인유의 7세 오연총吳延寵이 고려 예종 때 윤관尹瓘과 함께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오인유의 후손은 7세를 전후로 20여개의 파로 나뉘었다. 8세 오반吳潘의 후손은 찬성공파贊成公派, 9세 오중수吳仲守의 후손은 사복시정공파司僕侍正公派, 9세 오희吳僖의 후손은 양정공파陽亭公派, 9세 오처권吳處權의 후손은 용강공파龍岡公派, 9세 오생운吳生韻의 후손은 생원공파生員公派를 이루었다. 이외에도 묘제공파墓齊公派, 지군사공파知郡事公派, 사복시랑공파司僕侍郞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장춘공파長春公派, 해성부원군파海城府院君派,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징사공파徵士公派로 분파하였다. 그 이후 14세손 대에서 다시 여러 파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첨이 오씨의 도시조라는 것에 대해선 고증할 수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오첨과 오인유와는 어떤 관계인지 역사적 문헌이 불확실해 고증하기 힘들다. 현재까지 인유를 시조로 하는 해주 오씨와 현보를 시조로 하는 해주 오씨는 뿌리도 시조도 족보도 다르게 쓰고 있어 별개의 계통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영상 30분3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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