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께서 천하를 주유하실 때, 하루는 어느 개울가를 지나시는데 한 아비와 딸이 드러누워 있거늘 잠시 후 딸이 일어나 물새우를 잡아 아비의 입에 넣어 주니 아비가 도로 꺼내어 딸의 입에 넣어 주는지라. 증산께서 그 광경을 애처로이 바라보시다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서 베풀어서 저렇게 배고픈 사람들을 살려야 할 텐데…. 세상에, 오죽하면 저 어린것이 애비 입에다 넣어 주니 애비는 도로 자식 입에 넣어 주고 할꼬. 내가 어서 가서 저렇게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널리 구하리라.” 하시니라. - 도전 1편 70장
상제님께서 천하를 주유周遊하실 때면 1897년에서 1900년 무렵이다. 상제님께서 어느 개울가에 도착하셨을 때 한 가난한 부녀를 만나신다. 며칠 동안 굶주린 부녀는 몸을 가눌 힘이 없어 개울가에 드러누워 있다. 어린 딸이 일어나 용케 물새우를 잡아 아버지의 입에 넣어 준다. 자신의 배고픔으로 아버지의 처지를 헤아릴 줄 아는 아량으로 봤을 때 아이는 조금은 철을 아는 나이다. 딸아이 역시 아마도 굶주림에 이골이 났을 터다. 어린 딸의 애처로운 마음을 받은 아비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다시 물새우를 꺼내 자식의 입에다 넣어 준다. 감동보다는 차라리 안타까움과 슬픔을 자아내는 이 장면은 당시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구한말에 살았던 우리 조상님들의 평균적인 삶의 모습이다. 현대의 풍족한 의식주 생활은 당시 생활 수준과 비교해 봤을 때 가히 ‘역사의 기적’이라 할 만하다. 출발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일원이었던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통해 2017년 현재 GDP(Gross Domestic Product, 국내 총생산) 기준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국민들의 생활, 문화, 정치 수준 역시 세계적 수준으로 높아져 모든 면에서 여느 선진국 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리고 있다. 이 모든 혜택이 인간으로 오신 증산 상제님의 천지공사에서 비롯된 조화의 은혜임을 세상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
조선 말기 백성들의 고단한 삶은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대변된다. 전세田稅, 군포軍布, 환곡還穀의 삼정은 중앙정부가 백성에게 부과했던 세금이다. 정부는 안정적인 재정 확보를 위해 세 가지 재원을 지역별로 배당하는 총액제를 실시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수령의 권한을 강화시켜 향리를 동원하여 수취 체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배당된 총액을 채우기 위해 갖가지 부정한 방법이 동원되어 백성들의 분노를 샀다. 지방의 수령들 역시 삼정을 자신들의 잇속을 차리는 개인 착복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상업이나 상업적 농업으로 돈을 모은 부자 백성들과 가난한 백성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전정田政이라고 하는 토지세는 원래 1결당 20두 정도였으나 실제로는 정액을 채우기 위해 인정미人情米, 선가미船價米, 낙정미落庭米, 민고미民庫米 등의 이름을 붙여 1결당 100두 정도를 받아 갔다.
군정軍政으로 불리는 군포軍布는 장정마다 1필의 베를 바치는 것이었는데 사실은 군총제軍總制에 따른 총액을 채우기 위해 젖먹이 아이[황구첨정黃口簽丁], 죽은 사람[백골징포白骨徵布], 60세가 넘은 노인, 이웃, 친척으로부터도 군포를 받아 냈다. 그리하여 부유한 농민들은 가혹한 군정을 피하기 위해 양반 신분을 위조하거나 사들이기도 했다.
환곡은 본래 빈민구제책으로 춘궁기에 국가의 곡식을 농민에 대여했다가 추수 후에 10%의 이자를 가산하여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방 관아의 재정이 궁핍해지자 필요 이상의 곡식을 강제로 빌려주기도 하고, 번작反作이라 하여 출납을 허위 보고하여 잉여분을 차지하고, 가분加分이라 하여 창고에 남은 곡식까지 대출하여 이자를 취하고, 반작半作 혹은 분백分白이라 하여 반은 겨를 섞어서 1석을 2석으로 만들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이런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이자를 세금 형식으로 토지와 호구에 배당했다. 즉 환곡이 부세 형식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그 결가結價(세금)가 너무 높아 농민의 불만은 여전했다.
신분제의 구별 역시 상존하여 양반들은 농민들과 공인工人, 상인商人들을 상놈이라 천대했다. 그들이 지방의 향리, 수령과 결탁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방법도 기기묘묘하게 진화했다. 이에 지방 백성들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농민들의 불만은 처음에는 학정虐政의 금지를 요청하는 소청所請 운동으로 나타났고, 때로는 정부와 탐관오리를 비방하는 방서榜書, 괘서掛書(벽보) 사건으로 표출되었다. 오랫동안 원한이 누적된 지역에서는 관아를 습격하는 무장투쟁이 벌어졌다. 봉건시대에 반란은 곧 삼족이 멸하는 죽음의 길이다. 살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죽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일부는 새로운 살길을 찾아 정처 없이 길을 떠나는 유민流民의 삶을 택했다. 둘 다 죽기를 각오한 삶이요, 죽지 못해 사는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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