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께서 성도들에게 24절을 읽히시며 “그때도 이때와 같아 천지에서 혼란한 시국을 바로잡으려고 당태종唐太宗을 내고 다시 24절에 응하여 24장을 내어 천하를 평정하였나니 너희들도 장차 그들에 못지않은 대접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5편 399장 5~6절)
*수나라 말기에 비록 군웅들이 일어났으나, 모두 태종(이세민)에 의해 평정되었다. 지략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가 다 그 막하에 있었으니, 그 이름이 심히 성대했다. (구당서舊唐書 종실전에서 이세민을 평가한 말)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이 당태종의 눈을 쏘아 맞히매, 태종이 성 아래서 군사를 집합시켜 시위示威하고, 양만춘에게 비단 백 필을 하사하여, 그가 제 임금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킴을 가상嘉賞하였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들어가는 글
군기 빠진 오합지졸의 군대를 일컬어 ‘당나라 군대’라고 비아냥거리는 말이 있다. 하지만 역사상 중원 왕조 중에서 군사력으로 수위를 다투던 왕조가 당 제국이었다. 실제로 당군은 천하무적이었다. 수 제국 멸망 이후 빠른 시간 안에 중원을 통일하고, 북쪽과 서쪽 및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던 강군이었다. 이런 군대를 만들고 지휘한 인물이 당태종 이세민이고, 그를 보좌한 24명은 문무겸전한 인재들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바로 우리 고구려와 고구려 멸망 후 신라와의 전쟁에서 당군은 처절하게 패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간신히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시켰으나, 곧바로 대조영의 대진국大震國(발해)이 일어섰다. 문무왕이 이끄는 신라와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는 했으나, 결국 당나라의 실권자 측천무후는 현상 유지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동아시아는 평화가 유지되었다.
이 글에서는 수당 제국 교체 과정과 ‘정관성세貞觀盛世’라는 태평성대를 열었던 당태종 이세민, 그리고 그를 보필한 이십사장의 삶과 공과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한다.
위진남북조의 혼란을 종식시켰던 수 제국
581년 북주北周의 열두 대장군 중 한 명인 외척 양견楊堅이 외손자인 정제靜帝 우문천을 압박해 보위를 넘겨받고 수隋를 세운다. 위진남북조시대의 혼란을 겪고 있던 중원의 북방은 선비족 [주1] 인 탁발씨拓拔氏가 세운 북위北魏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들은 조조의 위나라를 정통으로 생각했기에 국호를 위魏로 했다. 당시 선비족은 장안이 속하는 관중 일대로 대거 이주했다. 이후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는 과정에서 장안을 근거지로 삼은 우문태가 서위西魏의 실권을 장악했는데, 이때 수문제 양견을 위시한 무장들이 조정의 중심이 되었다. 서위는 팔주국八柱國 십이대장군十二大將軍이라는 가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선비족의 군사 조직을 흉내 낸 부병제府兵制를 실시하였고, 처음으로 실시된 균전제均田制에 의해 파악한 장정을 군사력으로 활용하였다. 균전제는 모든 토지가 조정의 소유라는 전제하에서 출발하여 노예를 포함한 모든 농민들이 각각 그들의 경작 능력에 따라 일정량의 토지를 분배받는 제도인데, 이는 수당 제국의 핵심적인 통치 제도로 정착되었다.
선비족 지배층들은 상호 통혼하면서 강한 결속력을 유지했다. 즉 북위 개창에 큰 공을 세운 독고신獨孤信은 장녀를 북주 명제에게, 넷째 딸을 당고조 이연의 조부인 이호李虎에게, 일곱째 딸인 독고가라獨孤伽羅를 수문제 양견에게 시집보냈다. 당고조 이연의 모친과 수양제 양광의 모친은 서로 친자매 사이였다. 수양제는 이연과 외사촌 사이였으므로, 당태종에게는 외숙이었다. 20세기 초 베이징대 교수를 지낸 진인각陳寅恪은 북위 때 무천진을 지키던 선비족 무장 집단의 출신지인 관중을 중심으로 한 산시성陝西省인 관關과 간쑤성甘肅省과 산시성山西省 일대인 농隴일대를 합친 관롱집단이 수당 황실의 구성원이라고 주장했다.
수 제국을 세운 양견은 탁월한 정치력과 군사력으로 천하를 제패한 인물이었다. 비록 사위의 나라를 강탈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혼란을 종식시켜 만백성을 전쟁의 고통에서 구했다는 업적은 있었다. 그런 그가 죽은 뒤(독살설이 있다), 뒤를 이은 이가 수양제 양광陽廣이었다. 수양제는 즉위 후 대운하를 굴착하였다. 이는 북경 부근의 탁군涿郡에서 남으로 장강을 지나 지금의 항주에 이르렀다. 남북을 연결하는 대운하는 중국 지형 상 꼭 필요한 운송로였고, 양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꼭 해야 할 과제였다. 장강 남쪽의 풍부한 물산을 북쪽으로 옮길 경제적 필요도 있었다. 대운하 등 대규모 토목공사에 백성을 동원하고 과중한 부담을 끼친 데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없지는 않으나,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긍정적 효과도 공존했으므로 이 부분에 대한 비난은 재조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과 살수대첩
수양제는 자신의 치세 목적으로 고구려 정벌을 두고 있었다. 천하에 두 천자가 있을 수 없는데, 고구려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갖고 천손민족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고구려에서 보기에 중원 왕조는 변방에 불과하였다. 여기에 자신들에게 복속했던 선비족이 세운 신생 왕조 따위는 더더욱 주목의 대상이 아니었다. 북방 유목민족인 선비족 출신이었던 양제나 당태종은 반드시 이 고구려를 넘어서야만 했다. 그래서 수양제는 역사상 최대의 정벌군을 꾸렸다. 당시 4천6백만 정도였던 수나라의 인구수는 고구려의 10배 정도로 많았다. 그래서 수양제는 백만 정예 병사로 고구려를 단숨에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 많은 수의 군사들과 보급품을 운송하기 위해서도 운하는 필요했다.
드디어 612년 고구려 영양제 홍무 23년 수양제는 고구려 정벌을 단행했다. 육군 113만 3천8백 명, 보급부대까지 해서 2백만, 수군水軍 7만 명 총 참여 병력 4백만을 헤아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단일 전쟁에서 동원된 최대의 병력 수였다. 고구려 전체 남자 인구와 비슷한 수의 정벌군이 요동으로 몰려왔다. 중요한 사실은 이 대부대가 막무가내로 머릿수만 채운 오합지졸이 아니라 치밀한 수양제에 의해 모집되고 훈련된 정예병이라는 점이다. 추운 겨울에 요하를 건너 요동을 점령하고 고구려의 장점인 견벽청야입보전략 [주2]을 저지하기 위해 요동에 있는 모든 성을 공격할 군대가 있었다. 여기에 수군을 이용해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는 전략도 구사하였다. 전략상으로는 고구려가 불리했다. 여기에 고구려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뒤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고구려의 편이었다. 그해 겨울은 따뜻해 요하가 녹아 있었고, 주위는 개펄이 되어 있었다. 푸른 요하 강물 앞에 수양제는 난감했다. 선봉장 맥철장麥鐵杖의 희생으로 겨우 요하를 건넌 수양제는 악수를 둔다. 본래 전쟁에서는 돌발적인 상황이 많기 때문에 장수들의 임기응변이 중요하다. 황제의 친정親征은 이 점에서 불리하다. 수양제는 모든 장수들에게 군사 운용을 자신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받으라고 했다. 지휘관들의 재량권을 심하게 제약하였고, 그 절차가 복잡하였다. 이런 허점을 간파한 요동성의 성주는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면 항복 요청을 하고, 수락 여부를 받는 절차 중 전열을 정비해 수성에 나섰다.
이러기를 몇 차례, 수군隋軍은 요동 지역에서 단 한 개의 성도 점령하지 못했다. 질풍같이 요동의 요충지를 쓸어버리고 남하해 평양을 함락하려는 초토화 전략은 처음부터 차질을 빚고 있었다. 여기에 조의선인들의 후방 보급로 차단도 걸림돌이었다. 이런 식으로 몇 개월이 지나면 겨울이 된다. 수양제는 뭔가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했다. 정예군 30만으로 평양성 직공에 나섰다. 하지만 여기서도 악수를 두었다. 인간의 능력을 너무 높게 보았던지, 병사들에게 100일 치 식량을 휴대케 한 것이다. 완전 군장에 자기 식량까지 져야 했기에 짐의 총량이 석 섬 이상의 무게였다. 그래서 병사들은 식량을 버렸다. 우중문 등이 이끄는 수군은 압록강 무렵에서는 굶주림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水軍은 평양성 인근에서 고구려군을 업신여기고,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 평양성을 공격하다 고건무高建武(高成: 훗날의 영류제)의 매복 기습전에 의해 괴멸되어 더 이상의 지원이나 보급은 없었다. 어렵사리 평양까지 온 수나라 육군 30만은 중간에 직접 염탐하러 온 을지문덕乙支文德 대장군을 놓아주는 어리석은 짓도 한다. 수군은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다. 우중문은 퇴각을 하였다. 하지만 그냥 보낼 고구려군이 아니었다. 최후 결전장으로 잡은 살수薩水(물이 살살 흐르는 강)에서 수공水攻으로 수군의 대오를 무너뜨리면서 일방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왕인공王仁恭이 겨우 수습한 남은 병사가 2천7백이었으니, 이것이 살수대첩薩水大捷이다. 역사상 최대 군사를 동원한 작전은 사상 최대의 참패로 끝을 맺었고, 이후 수양제는 고구려 침공을 계속하였지만, 군수품 보급 책임자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으로 수 제국은 몰락의 길로 빠져들었다.
중원 통일 전쟁과 천책상장天策上將 이세민
수 제국은 전국적인 반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고, 대흥(장안), 동도(낙양), 강도(양주) 등 세 개의 도都만이 소용돌이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과 같았다. 617년 중원은 몇 개의 세력으로 결집하였다. 허난성에서는 양현감의 참모였던 이밀李密이 세력을 잡고 있었는데, 이를 토벌하기 위해 보낸 왕세충王世充은 오히려 낙양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발생했다. 또한 안휘성의 두복위杜伏威, 장시성의 임사홍林士弘, 산둥성의 서원랑徐圓郞, 이세민의 강적으로 부상하는 허베이성의 두건덕竇建德, 산시성의 유무주劉武周, 산시성의 양사도梁師都, 간쑤성의 이궤李軌, 설거薛擧 등도 각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에 북방의 돌궐도 호시탐탐 중원을 넘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혼란을 잠재운 이가 약관의 청년 이세민李世民이었다.
이세민은 수 개황 18년인 598년 12월에 당국공 이연李淵과 두태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세민이란 이름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었다. 이세민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생각함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어떤 상황이 닥치면 과단성 있게 처리하고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아서 사람들이 그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했다고 한다. 수양제가 고구려 침공에서 실패해 전국이 혼란해지자, 이세민은 남몰래 천하를 편안하게 할 큰 뜻을 품고서 선비들과 교유하고 널리 호걸들과 친분을 맺었다.
614년 선비족 출신으로 현명한 황후인 문덕황후 장손 씨와 혼인을 올렸다. 617년 6월 14일 우유부단한 부친 이연을 설득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이세민은 서하西河를 공격하여 남하하는 길을 열게 하였다. 이세민은 군기를 엄격하게 하여 약탈을 금지하였다. 이연은 근거지인 태원太原을 떠나 관중 지방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수양제가 수의 정예군을 이끌고 남쪽 양도에 있었기 때문에 장안은 비어 있었다. 또한 장안은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명분상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이연은 막내 이원길을 태원에 남기고 장남 이건성과 이세민을 앞세워 장안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유민, 반란 세력들이 합류하였다. 이세민의 군사는 3만에서 무려 13만으로 증가하였고, 이연의 전군은 20만이 넘는 대군으로 성장했다. 617년 11월 장안을 함락한 이연은 13세의 양유를 공제恭帝를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우며 스스로 당왕唐王을 자처했다. 장안성 점령으로 승기를 잡은 당은 천하 제패의 길에 나섰다.
618년 3월 수양제는 우문화급과 근위병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천하를 온통 혼란과 소동으로 몰고 결국 나라도 망하게 한 수양제의 치세는 14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에 이연은 국호를 당唐으로 연호를 무덕武德으로 하고 제위에 올랐다. 그해 환갑이 다 된 고구려의 영양제 역시 붕어하였다. 아들이 없었기에 이복동생인 건무가 후사를 이으니, 고구려 27세 영류제다.
설거, 설인고薛仁皐 부자신생 당에 첫 번째 시련이 닥쳤다. 장안을 노리는 설거, 설인고 부자였다. 이들은 유서 깊은 호족 출신으로 수만금 재산을 가진 부호였다. 이연은 이세민을 원수로 삼아 설거 부자를 토벌하게 했다. 초반에는 이세민이 학질에 걸렸다. 잠시 병권을 유문정劉文靜과 은개산殷開山에게 맡기면서 지키고 응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유문정 등은 이 말을 듣지 않다가 패배하였다. 그러던 중 일이 되려고 한 건지 설거가 급사하였다. 이세민은 설인고와 대치하다 식량이 다 떨어져 병사들 마음이 이반하자 맹공을 퍼부어 항복을 받아 냈다. 이 전투에서 이세민은 치밀한 분석과 인내심, 과감한 결단력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 얻은 인재가 이정李靖과 저량褚亮, 저수량褚遂良 부자였다.
북방의 유무주, 송금강宋金剛을 격파하다한편 돌궐의 후원을 받고 있던 유무주劉武周는 두건덕에게 패한 송금강宋金剛을 받아들이고는 당의 본거지인 태원을 공략하고 더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송금강에게는 기마술과 창에 뛰어난 울지경덕尉遲敬德이 있었다. 619년 찬바람 부는 11월, 이세민은 송금강을 막기 위해 출동하였다. 최악의 상황. 당의 운명이 이세민의 어깨에 걸려 있었다. 이세민은 설인고를 물리쳤던 지연 작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송금강군은 길어진 보급선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었다. 장기전을 펼친 끝에 송금강 군이 퇴각하자, 이세민은 전력을 다해 맹렬히 추격하였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밥도 거른 채 추격의 고삐를 죄었다. 송금강의 패배로 유무주는 크게 놀라 태원을 포기하고 돌궐로 도망갔다. ‘창업의 기지이자 나라의 근본’인 태원을 수복하자 당은 축제 분위기였다. 이세민은 여기서 울지경덕을 수하에 두고 장수로 임명하였다. 이에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자, 장부는 의기로써 서로 기약한 법이니 작은 의심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며 믿음을 보여 주었다. 울지경덕은 이세민이 왕세충과 싸울 때, 이세민의 목숨을 구하는 큰 공을 세웠다.
왕세충과 두건덕을 동시에 물리치다이세민이 중원 서북 지역을 평정하는 사이 중원 각지에서는 많은 세력들이 서로 물고 물리며 이합집산을 계속하였다. 양제를 살해한 우문화급은 이밀에게 패하고, 이밀은 낙양을 점령하고 있던 왕세충에게 패하여 당에 투항하였다. 그래서 중원은 크게 당唐과 낙양을 차지한 왕세충의 정鄭으로 이분되었다. 허베이의 두건덕이 세운 하夏는 왕세충을 지원하고 있었다.
하늘의 해가 두 개일 수 없듯 천하의 왕도 두 명이 있을 수 없는 법. 무덕 3년 620년 7월 이세민은 드디어 왕세충과 일전을 벌이기로 한다. 5만으로 구성된 이세민군은 낙양 서쪽에서 왕세충군을 격파하고 낙양을 포위하였다. 낙양 주변 주현들이 이세민에게 속속 항복하였다. 낙양을 공략하기 위해 이세민은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하지만 공략은 쉽지 않은 상황인데 두건덕이 군사를 몰고 왕세충을 도우러 왔다. 농민 출신 두건덕은 이세민만큼 포용력이 넓었다. 양제를 살해한 우문화급을 처치해 천한의 명분도 얻기도 했다.
절체절명의 상황. 이세민은 동생 원길에게 낙양 포위를 맡겨 두고, 자신은 3천5백의 정예 기병으로 두건덕 군을 교란시키려 했다. 호뢰관에서 복병을 두고 두건덕 군을 공격하였다.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치고 빠지는 전략으로 두건덕군을 호뢰관에 묶어 놓는 데 성공하였다. 이세민군과 두건덕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지속되는 동안 이세민은 적의 배후에서 당군의 기치를 높이 흔들며 혼란케 했다. 이에 배후를 당군에 점령당한 것으로 생각한 두건덕의 군사들이 일제히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혼란을 틈타 두건덕을 사로잡은 이세민군은 왕세충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때는 무덕 4년 621년 5월이었다.
이때 두건덕에게서 양제가 사용하던 어가와 옥쇄를 손에 넣었다. 이세민은 아우 원길을 비롯한 35명의 장수들과 기병 1만, 보병 3만을 거느리고 장안으로 개선하였다. 이에 이연은 이세민의 공로가 너무 커서 전대에 규정한 벼슬로는 불충분하다고 여겨서 왕공의 직위를 초월하는 천책상장(하느님이 책봉하였다는 뜻, 또는 신의 지략을 지닌 상승장군이란 뜻)이란 특별한 관작을 내렸다. 천책상장의 지위가 왕공보다 높았으니 태자의 지위가 애매하게 되었다. 이세민이 4년간 세운 공로로 당은 건국 직후 멸망하거나 지방 정권으로 소멸될 위기를 벗어나고 중원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남쪽에 남은 미약한 군웅들만 남았을 뿐이다. 이 엄청난 공은 골육상쟁의 씨앗이 되었다.
이세민의 전투 스타일이세민은 선비족 출신답게 기동력을 중시하였다. 중기병보다는 경기병을 주력으로 하였다. 일단 수비를 굳건히 하고, 적의 도발에 응하지 않고 인내심을 발휘하다가, 경기병을 이용해 적의 보급을 무력화시키고, 승기를 잡은 뒤에는 폭풍처럼 몰아쳐서 이기는 전술을 주로 썼다. 적의 후퇴 시에는 끝까지 추격하여 포위 섬멸하는 집요함을 보여주었는데 유목민의 빠른 기동력과 전술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현무문의 변과 돌궐전쟁
당이 천하의 대세를 장악하자, 이세민의 공적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이에 형인 태자 이건성과 동생인 이원길의 불안감은 높아졌다. 양측이 대립하던 중 626년 무덕 9년 6월 4일 이세민은 백제오白蹄烏(털이 검고 다리 부분만 흰색인 명마로 여겨짐, 이세민이 전쟁터에서 주로 탔던 6마리 준마駿馬 즉 육준 중 유일하게 살아있던 말)에 올라 궁궐인 태극궁 북문인 현무문에서 형과 아우를 제거하는 이른바 ‘현무문玄武門의 변’을 일으켰다. 이후 당고조의 양위를 받고 30세 나이에 대당 제국 황제 자리에 올랐다. 연호는 정관貞觀으로 정했으며,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다. 또한 현무문의 변에서 자신의 반대편에 섰던 위징을 비롯한 여러 인재들을 포용함으로써 개국 초기의 혼란을 잠재웠다.
하지만 즉위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돌궐의 20만 대군이 전격 남침하였다. 돌궐 국왕 힐리가칸頡利可汗은 시필가한의 아들인 돌리가한과 함께 산시성 무공현을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내려왔다. 울지경덕이 저지하려 했으나, 이를 뚫고 장안 근처까지 진격했다.
본래 이연 일가는 태원 북쪽 돌궐의 남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런 그들은 돌궐의 암묵적 지원을 받으며 중원 통일에 나섰다. 하지만 중원에 통일 왕조가 들어서기를 원치 않은 돌궐은 자주 침입을 해 왔다. 돌궐은 이때 장안 북쪽 위수 북안에 주둔하고 당에 사신을 보내 위협을 했다. 이에 당태종은 결사 항전도 불사하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현무문의 변 같은 골육상쟁으로 즉위한 지금 전쟁을 벌일 만한 여력이 없었지만, 이런 강경한 자세로 겨우 돌궐과 굴욕적인 맹약을 맺었다.
이후 당태종은 군대를 조련하였다. 돌궐이 내분으로 약화되는 조짐을 보이자 629년 당태종은 이정, 이세적, 시소 등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돌궐을 공격하게 하였다. 정양도행군총관으로 사령관인 이정李靖은 국가와 사회 제도가 만들어내는 조직력, 교육 능력, 그리고 압도적 물자의 우위 등의 앞선 장점으로 군대 편제와 전술을 변형시켰다. 보병의 기본 대형을 사각형 방진에서 삼각 대형으로 바꾸었다. 과거에 수나라는 고구려 정벌 때 퇴각하는 과정에서 고구려군의 기습을 방지하고자 사각형 방진을 유지했으나 결국 실패했던 전력이 있었다. 이정은 한 개의 방진을 두 개의 삼각형으로 나누었다. 규모를 줄인 대신 민첩함을 증진시켜 상황에 따른 대형 변경 능력과 속도를 증가시켰다. 이는 거칠고 야성적인 유목 기병과의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기본적으로 유목 기병은 자기중심적이고 교육 수준도 떨어져, 복잡한 대형을 만들거나 습득하는 능력이 뒤쳐졌다. 여기에 당태종이 선호한 경기병輕騎兵 수도 유목 기병을 압도하였다. 당의 경기병대는 개개인의 능력은 돌궐 기병에 비해 떨어져도 다양한 전술 운영 능력을 보유했고, 기병과 보병 혼용 전술은 탁월했다. 여기에 당 제국의 전통적인 강점인 노병과 궁수를 사용하면서, 기병과의 근접전에서는 창병으로 전환하는 유연성을 보여 주었다. 비싼 활을 던져 버릴 정도로 물적 우위를 이용한 전략이었다.
이정은 정예 기병 1만에게 20일 치 식량을 나눠 준 후 전열을 채 갖추지 못한 힐리가칸頡利可汗을 현재 내몽골 이연호특시二連浩特市 서남쪽에서 기습해 대승을 거두었다. 간신히 몸을 피한 힐리가칸은 결국 포로의 몸이 되어 장안으로 잡혀 왔다. 당태종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북쪽의 패자 돌궐을 평정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전승 축하연에서 고조 이연의 비파 소리에 맞추어 밤새 흥겹게 춤을 추기도 하였다.
당의 위세에 압도된 유목민 집단들은 당태종을 유목 세계의 패자라는 뜻을 지닌 천가한天可汗(텡그리 카간 Tengri qaghan)으로 추대하였다. 국왕 앞에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자가 붙은 이 호칭은 최고의 존칭이다. 돌궐 패망과 함께 그간 돌궐의 세력에 예속되어 있던 거란, 해, 습飁 등 동부 내몽골 홍안령 기슭 일대에 거주하던 유목 민족들이 당나라에 투항했다. 이로서 당 태종은 일전에 힐리가한이 장안으로 군대를 몰고 왔을 때 철군을 애걸한 원한을 갚고, 중원(천자)과 초원(가칸) 양쪽 모두의 지배자가 되었다. 또한 640년 후군집候君集과 소정방蘇定方은 서돌궐에 복종했던 투루판에 위치한 고창국高昌國을 멸했다. 당태종은 위징魏徵 등의 반대를 뿌리치고, 주현(안서도호부)으로 편제하여 당 조정이 직접 지배하는 영역으로 삼았다. 고창국 멸망은 곧 당 제국의 북부와 서부에 있던 세력들이 모두 당에 복속되었음을 말한다. 이로써 당나라는 서쪽으로 실크로드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게다가 이정의 당나라군은 티베트 고원 북편 경사면에 있던 토욕혼吐谷渾을 격파했다. 한편, 서남의 티베트 방면에 대해서는 당은 토번 최고의 영웅 33대 임금 송짼감뽀松贊干布(617년∼650년)에게 문성공주文成公主를 하가下嫁하는 등 회유책을 써서 안정을 꾀하였다. 이제 동으로 황해에 이르고, 서로는 언기焉耆, 북으로는 고비사막, 남으로는 임읍林邑에 이르는 지역이 모두 당의 주현으로 편제되었다. 이제 당은 동서 9,510리, 남북 10,919리에 달하는 대제국을 구축하였다. 이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 중 대적할 수 있는 나라는 오직 고구려만 남게 되었다.
최대의 오점, 고구려와 전쟁
당태종 초심을 잃다하지만 이렇듯 뛰어난 당태종도 현후賢后인 장손황후長孫皇后(636년 정관 10년 36세로 승하)와 위징魏徵(정관 17년 643년 사망)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승리의 단물에 빠져 오만함을 드러냈다. 그의 치세에 최대의 오점을 내는 사건이 터졌다. 하나는 황태자인 승건을 폐하면서 나약한 치治(훗날의 고종)를 태자로 삼은 일이다. 고종 사후 그의 부인인 측천무후(태종의 후궁이기도 했다)는 일시적으로 국호를 주周로 바꾸면서 당의 중쇠中衰를 야기했다. 상대적으로 나약한 아들을 태자로 삼으면서 쟁쟁한 인물들을 포진시켜 부족함을 메우려 했는데, 그만큼 황제권이 제한받는 약점도 병존했다.
고구려 정벌 준비그리고 생애 마지막 과업으로 고구려 정벌을 단행하였다. 천하에 두 천자가 있을 수 없듯, 두 영웅이 있을 수 없었다. 초기 고구려는 영류제가 친선 전략을 폈고, 당으로서도 건국 초기라 충돌을 피했다. 하지만 천하의 진짜 천자가 되고 싶던 당태종은 고구려가 아무리 저자세 굴욕 외교로 나와도 내부 여건이 성숙되면 고구려를 침공하려 했다.
수隋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당태종은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이세적 같은 소수의 장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군신이 고구려 원정을 반대했다. 하지만 태종은 고집을 부렸다. 당태종이 보기엔 고구려 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단순히 당의 침공만을 막을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을 멸망시켜 고구려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거대한 정치가였다. 그렇기에 오히려 선수를 쳐야 하고,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판단했다.
출진과 고구려 요동 방어선 붕괴드디어 645년 태종은 고구려 친정親征에 나섰다. 전략은 수륙병진책과 기동전이었다. 이세민의 본군 20만에 고구려의 눈이 쏠려 있을 때, 이세적李世勣의 육군 6만과 장량張亮의 수군 4만의 움직임은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당군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출몰하여 요동 지역의 지휘 체계와 연락망 및 협력 체제를 무너뜨리는 전법을 구사했다. 이런 전략의 성공으로 고구려는 대혼란과 공포에 빠져들었다.
동시다발적인 파상 공세에 고구려의 요동 지역 수비선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개모성蓋牟城(현 심양시 소가둔구蘇家屯區 탑산산성 塔山山城)이 함락되고, 고구려 수군 기지 비사성卑沙城(현 대련만 북안北岸 대화상산大和尙山)도 무너졌다. 고구려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난공불락의 성인 요동성遼東城을 1차 저지선으로 삼아 전열을 정비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평지성이었던 요동성은 공성 무기의 입체적 공격과 때마침 불어오는 강풍을 이용한 화공에 무너지고 말았다. 여기에 백암성 성주 손대음孫代音의 항복이 이어졌다.
연개소문은 안시성安市城을 제2차 승부처로 삼았다. 그래서 북부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 등에게 말갈군을 포함한 15만 대군을 거느리게 해서 안시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기존 사료에서는 고구려군이 패배하였다고 전하지만, 『환단고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이때 고구려 구원군은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를 쌓고, 당군에 지구전을 펼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되어 있다. 『환단고기』를 제외한 다른 사서들은 당측의 기술이고 당태종이 고연수, 고혜진의 대군을 패배시킨 방법도 사신을 보내 방심케 한 다음에 들이닥쳤다고 하는데, 상식에 맞지 않는다. 거기에 말갈 병사 3천3백을 구덩이에 산 채로 묻었다고 하는데 그만큼 당군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국가의 명운을 건 대전에서 15만 대군의 지휘를 과연 이 두 욕살에게만 맡겨 두었을까? 아마도 연개소문이 직접 휘하에 거느리지 않았을까?
실제 15만이 되는 대군이 패전하고 고립무원이 된 안시성이 외부의 도움 없이 3개월을 버티었다는 건 불가사의하다. 외부의 전략적 도움이 있었을 것이고, 총사령관인 연개소문이 가만히 손 놓고 있지는 않았으리라. 안시성 위치는 해성海城시 동남쪽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비정된다. 전략적 요충지고 마치 럭비공을 갈라놓은 것처럼 오목한 모양의 천연 요새이긴 하지만, 토성이고 둘레가 4km 정도로 조금 작은 성이다. 그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있다.
안시성의 강점은 성주 양만춘楊萬春(梁萬春)의 리더십과 군관민의 혼연일체가 된 단결력, 명분 없는 당군의 침공을 막아 내겠다는 결사 항전의 의지가 있었다는 점이다. 늦여름부터 시작하여 겨울까지 계속된 당군의 파상 공세를 안시성은 막아 냈다. 안시성에서 발이 묶인 당태종은 여러 가지 꾀를 내었으나 아무 방법이 없었다. 결국 당태종은 9월 18일 철군하고 말았다. 표면적 이유는 양식이 다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고구려가 당의 보급로를 차단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에 장량의 수군이 비사성 함락 이후 어떤 활약도 보여 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동안 점령된 성들이 고구려에 의해 다시 재탈환되었음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때 연개소문이 베이징 북쪽 상곡 지방을 공격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당군이 안시성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연개소문과 조의들이 중원 내륙을 공격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당태종은 커다란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양쪽에서 포위당한 채 수 제국처럼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여기에 당태종 자신이 양만춘이 쏜 화살이 왼쪽 눈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이는 당태종의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안시성 혈전과 당태종의 최후당태종은 철군 길을 요하 하구로 잡았다. 요하 하구는 철군할 때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긴 하지만, 갯벌이 펼쳐진 늪지대로 많은 장비를 지닌 군대가 지날 길은 아니었다. 실제 이곳은 ‘진흙과 물이 있어 마차가 통하지 못하는 곳’,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로 삼아야 하는 곳’, ‘당태종 스스로 말의 칼집에다 장작을 매어 일을 도와야 할’ 정도의 험로였다. 굳이 이 길을 택한 이유는 다른 길은 이미 고구려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패퇴하는 당태종을 추격하여 그에게 항복을 받고 장안에 입성했다고 하며, 이에 산시성 허베이성 산둥성 등지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과 고구려가 동아시아 운명을 걸고 벌인 대전쟁은 당의 패배로 끝났다. 하지만 이후 당은 이때 교훈을 바탕으로 전략을 새로 세웠다. 즉 압도적인 물자를 바탕으로 국지적인 소모전과 요동을 우회한 상륙전 등으로 고구려 국력 고갈을 시도했고, 실제로 많은 전투가 압록강 너머 평안도 일대에서 벌어졌다. 결국 668년 평양성 안의 내분으로 당군은 평양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고구려 원정 후 당태종은 병상에 드러눕는 일이 잦아졌다. 그 와중에서도 고구려 정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고구려 정벌을 시도하던 당태종은 정관 23년, 649년 5월에 ‘고구려에 대한 한恨’을 품고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은 요동의 전역을 파하라(罷遼東戰役: 요하를 넘지 마라. 고구려 침공을 그만두라)였다. 죽음의 원인에 대해 내종內腫, 한질寒疾, 이질 등 다양한 표현이 있는데, 이는 안시성에서 화살을 맞은 일을 숨기고자 한 데서 발생한 병명일 뿐이다. 그해 8월에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예천현 동북쪽 90리 밖 구종산九嵕山에 있는 소릉昭陵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문황제文皇帝이고,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정관성세의 빛과 그림자
당의 창업자는 고조 이연이지만, 수 말기의 여러 세력을 제압하고 실질적으로 창업을 주도한 인물은 당태종 이세민이다. 그는 현무문의 변으로 형제를 죽이고, 부친을 압박하여 29세에 제위에 오른 뒤 23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그의 정치는 이상적으로 평가받아 ‘정관의 치’라고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그의 치세는 수양제의 업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수양제 대업 2년인 606년 전국 호구는 890만여 호였다. 정관 시대보다 무려 세 배 가까이 되었다. 당 현종 시기인 천보 13년 754년의 호구가 907만 호였다고 하니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는 데 150년 시간이 걸렸던 셈이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알려 준다. 수나라 때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수당 교체의 혼란기와 무리한 고구려 원정 등에서 무수한 백성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이다. 객관적으로 정관지치를 지나면서야 비로소 수 제국의 전성기 때 수준을 회복할 수 있는 물꼬가 열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도덕적으로 제위에 오르기 위해 혈육을 살해하고, 동생의 부인을 비妃로 삼는[주6] 패륜 행위를 하여, 후세 주희로부터 이민족 출신이어서 패륜을 저질렀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정치 수완과 그가 이룬 업적은 경시할 수 없다. 돌궐을 복속시키면서 농경과 유목 지역을 통괄하는 최고 통치자가 되어, 세계 제국의 위치를 공고히 하게 되었다. 경제 제도인 균전제均田制, 조용조租庸調 제도로 세금을 걷으면서 국가 재정은 풍족해졌고 민생은 안정되었다. 그 결과 불과 4년 만에 유랑하며 흩어진 사람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오고 밤에도 문을 닫아걸지 않으며, 길 떠나는 사람이 식량을 지니고 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 큰 흥성 시기를 열었다. 그와 함께 뛰어난 인재를 곁에 두고 수시로 조언을 들으며 이를 정책에 반영하여 군신이 함께 지혜를 모아 치국평천하에 임하는 자세를 중시하는, 이른바 천하위공을 펼쳤다. 당태종 때는 예악과 인의, 충서, 중용 등의 유가가 강조하는 덕치가 꽃을 피웠다. 그의 치세에는 유교와 불교 도교 등 삼교가 정립하는 형세로 사상적인 자유와 함께 그 내용이 풍성해졌다. 통치 제도인 삼성육부제三省六部制와 인사 제도인 과거제科擧制는 동아시아의 기본적인 통치 체제로 자리를 잡았다. 모든 제도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면서 통치의 전범을 세웠다. 당태종 시기 당나라는 국제적인 개방성과 실질성과 실용성을 숭상한 특징과 함께 여러 민족의 문화를 하나로 녹여 새롭게 변용한 문화를 만들어 내고, 낙천적이며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는 대범한 자세를 견지했다. 당시 장안의 인구수는 100만을 넘었고 상주 외국사절 숫자만 4천여 명이 넘었다. 당태종이 인재 경영과 함께 직언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항상 민생을 배려하는 명군이었음은 틀림없다.
당태종을 보좌한 이십사장二十四將
이십사장二十四將은 태원太原에서 군사를 일으킨 당국공 이연을 도와 당 왕조 건국에 일조하고, 현무문의 변에서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을 도와 그가 황제로 등극하는데 공을 세우고, 당태종의 정관성세를 연 24명의 공신을 말한다. 정관 17년인 643년 당태종 이세민은 이들을 표창하게 위해 장안에 있는 능연각凌煙閣에 당대 최고의 화가인 염립본閻立本(?-673)에게 이들의 초상을 그리게 한 것에서 유래한다. 능연각에 24인의 화상을 걸어둔 뒤 그는 자주 그곳에 가서 화상을 감상하면서 그들의 행적을 기념하고 찬양했다. 문헌에서는 이들을 ‘훈신이십사인勳臣二十四人’, ‘능연각공신 이십사인凌煙閣功臣 二十四人’이라고 통칭한다.
당태종 이세민은 확실히 정치적 군사적 능력이 뛰어난 데다 야심 또한 컸다. 그가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전투에 참전해 악전고투 속에 승리를 거둔 일이나 태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책략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당대 최고 책사로 평가받는 방현령房玄齡의 도움이 컸다. 방현령은 18세 때 수나라에서 실시한 진사 시험에 급제한 인재로 당태종의 장자방으로 불렸다. 방현령은 개인적 품성도 뛰어났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이세민이 출정해 승리를 거둘 때마다 대다수 장수들은 재물을 모으기에 바빴으나, 방현령은 먼저 인재를 찾아 진왕 이세민의 막부로 데려갔고 그들은 제각기 죽을힘을 다해 이세민을 도왔다. 현무문의 변을 실질적으로 기획한 인물로, 주요 보직을 역임하며 이세민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다.
이세민이 천책상장에 오르며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되었을 때, 인재를 끌어모으고 활용하였다. 이세민 휘하에는 이른바 18학사學士라 불리는 인재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이세민을 보위에 올리기 위한 정예 참모 집단이었다. 이들은 천하 대세의 흐름을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일을 했던 일종의 국정 자문단이었다. 이 중 방현령과 두여회는 지모와 지략이 뛰어났고, 육덕명陸德明과 공영달孔穎達은 경학에, 요사렴姚思廉은 문학과 시문에, 우세남虞世南은 구양순, 저수량과 함께 당나라 초기 서예의 3대가로 일컬어지며, 왕희지의 서법을 익혀 해서楷書에서는 일인자로 칭송받고 있다. 그 밖의 인물들도 다 뛰어난 준걸들이었으나, 단연 으뜸은 방현령이었다. 방현령의 지모와 두여회의 결단력으로 신생 당 제국은 안정과 번영에 큰 기여를 하여 ‘방모두단房謨杜斷이란 말을 만들었다. 30여 년간 군신으로 인연을 맺은 방현령은 20년간 안정적으로 재상의 직분을 수행하고 죽어서도 무한한 명예를 누렸다. 그의 장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역사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일찌감치 자발적으로 이세민에게 투항하였다. 둘째는 지극한 충성과 근면함이고, 셋째로는 대권을 손에 쥐고도 절대로 이세민이 위협을 느낄 만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모든 일을 잘 처리하면서도 이세민에게 충분한 자문 역할만 했을 뿐, 혼자서 어느 한 분야의 권력을 독점하지 않았다. 그런 그였기에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장안에 남아 후방을 지원할 수 있었다.
당태종이 덕정을 편 데는 위징魏徵의 공이 컸다. 태평성세가 계속되자 신하들이 당태종을 찬양하는 중에서도 위징은 열 가지 결점을 지적했다(諫太宗十思疏). 자만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친인척이나 연공서열 등은 철저히 배제하고 유능한 인재 위주의 정사를 펼치게 하였다.
24장의 수장인 장손무기長孫無忌는 북위의 황족인 탁발씨 후손으로 수나라 우효위장군 장손성의 아들로, 이세민의 황후인 장손황후의 오빠이기도 했다. 그는 매제 당태종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보필하여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정관 10년(636) 여동생 장손황후가 죽으면서 오빠를 중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으나 이세민은 이를 좆지 않았다. 위징 사후 승상 겸 태위가 된 그는 고구려 침공에 나섰으나 대패하였고, 이후 당 고종 이치가 측천무후가 되는 당태종의 후궁 무씨를 황후로 맞아들일 때 반대하다가 작위를 박탈당하고 귀주로 유배를 가서 자결하고 만다.
두여회杜如晦는 대대로 북조와 수나라에서 벼슬을 한 관료 집안 출신으로 수나라 때 현위 벼슬을 한 후 초야에 묻혀 지내다가 이세민 휘하로 들어갔다. 이후 문학관 십팔학사의 일원이 되었다. 머리는 비록 방현령에 미치지 못했으나 결단력이 뛰어났다.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공평한 태도로 일관한 까닭에 위징과 더불어 현상賢相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진숙보秦叔寶는 지금의 산둥성 제남시인 제주齊州 역성歷城 출신으로 용맹스럽고 절개가 굳었던 인물이다. 매번 선봉에 서서 용맹함을 드러냈다. 당고조 이연은 진숙보를 일컬어 처자식을 돌보지 않고 와서 공을 세운 인물로 자신의 살을 베어서 진숙보에게 내려 주어도 좋다고 했을 만큼 그의 공을 인정했다.
이(세)적李(世)勣은 돌궐 격파에 공을 세웠고 고구려 침공에 종군했다. 결국 당고종 때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하는 공을 세웠다. 울지경덕蔚遲敬德은 창의 명수로 각종 전투에 참여해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으며, 현무문의 변에 참여했다. 이정李靖은 파촉 공략에 공을 세웠으며, 당태종과 역대 병법을 논한 『당리문대唐李問對(이위공 병법)』는 송나라 이래 무경 칠서의 하나로 선정돼 무인들의 필독서가 됐다. 굴동통屈突通은 수나라 장수였다가 포로가 되어 귀순해 전공을 세웠다. 후군집候君集은 병부상서를 지냈으며 토욕혼 토벌에 공을 세웠다. 소우蕭瑀는 남조 양나라 황실 후손으로 사리 판단과 인화에 뛰어나 재상을 지냈다. 고사렴高士廉은 명민한 데다 기억력이 좋았고, 촉 지방의 풍속을 바꾸고 학교를 부흥시켰다.
24절후節侯와 춘생추살春生秋殺
당태종의 24장은 24절기라는 시간적인 개념과 관련이 있다. 이는 후한 광무제를 도운 28장이 28방위라는 공간적인 개념과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에 대응된다. 이십사절후二十四節侯, 이십사기二十四氣, 이십사절二十四節이라고도 한다.
24절기는 옛사람들이 이룩한 지혜의 결정으로 그 의미는 심원하며 용도는 광범하여 우리의 모든 생활 방식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지금도 날씨와 기후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듯 예전 농업 생산이 더 중요하던 시대에는 더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절기節氣는 1년을 스물네 마디의 기후로 나눈 것이다. 기氣는 15일 간격으로 계절의 변화를 읽은 것이고, 이 15일을 다시 5일 간격으로 세 번 나눠 변화를 읽은 것을 후候라 한다. 24절기와 72후를 합쳐 기후氣候라 부른다.
황경黃經은 태양이 춘분점을 지나는 점을 기준으로 해서 황도에 따라 움직인 각도를 말한다. 황도는 지구에서 보았을 때 태양이 1년 동안 하늘을 한 바퀴 도는 길을 말한다. 이 황경은 15도를 간격으로 해서 0도일 때를 춘분, 15도일 때를 청명이라고 하는 식이다. 절기는 우주의 기운이 배치된 지도와 같아서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운과 기에 관여한다.
24절기의 구분은 계절과 기후 그리고 물후物候(만물의 기후 변화에 대한 반응) 등 자연 현상의 변화를 충분히 고려한 것이다. 그중 입춘, 입하, 입추, 입동, 춘분, 추분, 하지, 동지는 계절을 반영한다. 춘분, 추분, 하지, 동지는 천문학의 각도에서 구분하여 계절의 분기점이 되는 기절기基節氣로 음과 양의 관계가 크게 변화하는 마디이다. 입춘, 입하, 입추, 입동은 사계절의 시작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소서, 대서, 처서, 소한, 대한 등의 다섯 절기는 기온의 변화를 반영하고 우수, 곡우, 소설, 대설 등은 비와 눈이 내리는 시간과 강도를 나타낸 것이다. 백로, 한로, 상강은 수증기의 응결과 승화 현상을 나타내면서 기온이 점차 하강하는 과정과 정도를 반영한다. 소만과 망종은 작물의 성숙과 수확 상황을 반영한 것이고, 경칩과 청명은 자연의 물후 현상을 나타낸다.
절기는 바꿔 말하면 농부의 마음으로 만들어진 생명의 리듬이다. 절기에는 가을에 풍년을 기원하는 농부의 마음이 담겨 있다. 농부가 봄에 사생결단으로 해야 할 일은 씨앗 발아이다. 봄이 살리는 계절이라면, 가을은 죽이는 계절이다. 여름 동안 벌여 놓은 일들을 한 번에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한 번에 하나씩이라는 자세가 필요한 시점으로 산만함을 포착하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것을 갈가리 찢어 버리는 결단력이 가을의 리듬과 하나가 되는 때다. 그래서 과거에는 봄여름 동안 미루어 둔 형벌을 가을에 대대적으로 몰아서 집행했다. 이제 더 이상 봐줄 수 없기에, 가을의 풍요롭고 넉넉한 이면에는 혹독하고 무자비한 숙살의 기운이 작용한다.
칠석, 백중, 추석과 같이 신명 나는 명절의 연속인가 싶지만, 다른 쪽에서는 가차 없이 범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범죄란 실정법을 어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을 무렵에 접어들면 지난 봄여름 동안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게 대체로 판가름 난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눈물의 질과 밀도는 다르다. 한쪽은 수확으로 인한 기쁨의 눈물이지만, 다른 쪽에선 참회와 후회의 눈물이다. 자연의 흐름은 가차 없고 또한 지극히 공정하다. 가을은 바야흐로 숙살지기의 때다! 쌀쌀하고 매서운 기운으로 성장과 성숙을 모두 마치고 불필요해져 버린 가지와 잎을 모두 떨구는 자기 부정의 시간이며 열매를 거둬들일 시간이다.
후회가 막심해도, 자신이 맺은 열매가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다 떠안아야 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바로 숙살의 숙肅이다. 가을의 숙살지기를 온몸으로 견디고 나면 나무든 사람이든 더욱 단단해진다. 그 힘으로 겨울을 살고 다시 봄을 열 수 있으리라. 나무에 매달린 열매가 여물지 못하면 땅에 떨어질 때 박살이 난다. 그렇기에 열매의 껍질은 단단하기 마련이다. 입추가 지난 후에 처서가 오듯이 숙熟한 후에야 숙肅할 수 있다. 가을의 성숙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의 태도가 엄숙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이때에 이르러 천지가 마침내 숙연해진다.
당태종이 넘지 못한 산, 고구려 대장부[주3] 연개소문(603년∼657년)
당태종의 유일한 맞수
천하를 제패하려는 당태종이 결국 넘지 못한 산이 있었다. 바로 동방의 종주국 고구려였다. 문무를 겸전하고 지략이 뛰어났던 명장 당태종의 유일한 맞수라 할 수 있는 이가 바로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이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 임금을 시해한 무자비한 독재자이고, 고구려 멸망에 책임이 있다는 통설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그를 악인으로 만들려는 조직적 작업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를 다룬 거의 대부분의 사료는 중국 측 자료였다. 즉 고구려 측 사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후세에 그를 다룬 기록은 연개소문에게 무척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 수록된 『태백일사』 「고구려본기」를 보면 연개소문은 본래 우리의 고유한 신교 문화의 상무尙武 정신을 크게 떨친 희대의 대영걸임을 알 수 있다. 603년 영양제 홍무 14년 5월 10일에 태어난 그는 아홉 살에 조의선인皁衣仙人[주4]이 되었다. 모습이 거대하고 위엄이 있으며 의기가 호방하고 초일한 자세가 있었고, 몸에는 다섯 개의 큰 칼을 차고 있었다. 병사들과 함께 섶에 나란히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고 한다. 또한 당대 최고의 병법가이기도 하였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당태종의 이십사장 중 제1 명장인 이정이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웠다고 전하고 있다.
천하를 제패하려는 당태종이 결국 넘지 못한 산이 있었다. 바로 동방의 종주국 고구려였다. 문무를 겸전하고 지략이 뛰어났던 명장 당태종의 유일한 맞수라 할 수 있는 이가 바로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이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 임금을 시해한 무자비한 독재자이고, 고구려 멸망에 책임이 있다는 통설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그를 악인으로 만들려는 조직적 작업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를 다룬 거의 대부분의 사료는 중국 측 자료였다. 즉 고구려 측 사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후세에 그를 다룬 기록은 연개소문에게 무척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 수록된 『태백일사』 「고구려본기」를 보면 연개소문은 본래 우리의 고유한 신교 문화의 상무尙武 정신을 크게 떨친 희대의 대영걸임을 알 수 있다. 603년 영양제 홍무 14년 5월 10일에 태어난 그는 아홉 살에 조의선인皁衣仙人[주4]이 되었다. 모습이 거대하고 위엄이 있으며 의기가 호방하고 초일한 자세가 있었고, 몸에는 다섯 개의 큰 칼을 차고 있었다. 병사들과 함께 섶에 나란히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고 한다. 또한 당대 최고의 병법가이기도 하였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당태종의 이십사장 중 제1 명장인 이정이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웠다고 전하고 있다.
세계관의 충돌
그렇다면 연개소문이 영류제榮留帝를 시해한 패륜아라는 굴레를 씌운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세계관의 충돌에서 비롯되었다. 고구려 27세 영류제는 즉위 후 당과 친선 외교를 고수하였다. 물론 수나라와 대전을 겪은 뒤이기에 전략적으로 친선을 도모할 필요는 인정할 수 있지만, 당에게 고구려의 봉역도封域圖(강역도)를 바친 일(628년)이나, 당의 고구려 침입 때 당의 후방을 견제해 줄 수 있는 세력인 돌궐 주력군이 당에 의해 격파되고, 힐리가칸이 사로잡혔을 때 수수방관한 부분은 굴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631년 대수對隋 전승기념탑인 경관京觀을 당의 요청에 의해 헐어 버렸기 때문에, 강력한 상무 정신을 가진 연개소문 같은 대당 강경파들의 격렬한 반발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던 중 642년 정월 영류제는 막리지인 연개소문에게 장성長城[주5]을 쌓는 역사를 감독하게 했다. 고구려의 막리지莫離支는 군사와 정치를 총리總理하는 비상시국 최고 관직이다. 이런 위치에 있는 이를 한직으로 보냄으로써 대당 강경 세력을 무력화하려 했다. 이에 때를 보던 연개소문 일파는 정변을 일으켰다. 이는 대당 굴욕 외교로 일관한 영류제와 그 세력에 대한 연개소문과 대당 강경파의 혁명 기의였다. 이는 다른 세계관을 가진 세력에 의한 혁명이었다. 즉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닌 정치 세력이었다면, 영류제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포기하고 당 제국에 복속됨으로써 존속을 도모하는 정치 세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연개소문은 정변 당시 임금을 시해하지 않았다. 변고를 전해 들은 영류제는 몰래 달아나 송양松壤에서 군사를 모으려고 했다. 송양은 현재 평안도 강동군 대박산으로 구을단군의 능이 있는 곳이며 고주몽 성제가 다물도多勿都로 삼은 곳이다. 하지만 영류제는 자신의 의도에 응하는 이가 없자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하였다.
대당전쟁의 총사령관
정변 후 연개소문은 보장제寶臧帝를 제위에 모셨다. 그는 모든 법을 공정무사한 대도로 집행함으로써, 자신을 성취하고 완성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고(성기자유成己自由), 만물의 이치를 깨쳐 차별이 없는(개물평등開物平等) 나라를 만들었으며, 조의선인들에게 계율을 지키게 하였다. 또한 무조건적인 강경책을 펴지는 않았다. 당의 국교인 도교 수입을 자청하여 독자적인 천하관을 유지하면서도 전술의 유연성을 택하는 정치가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보장제 개화 4년에 벌어진 국운을 건 당태종과의 전쟁을 총지휘하였고, 안시성 혈투를 지원하였으며, 조의들을 지휘하면 신출귀몰하게 전략을 구사하여 마침내 승리를 이끌어 냈다. 세계 최강대국 당이 전 국력을 기울여 쳐들어온 전쟁을 당당하게 승리로 이끌어 고구려를 구해 낸 용장이자 영웅인 것이다.
그 후
당태종 사후 고구려와 당 사이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당은 수시로 고구려를 침입하여 고구려가 항시적인 전시 상태를 유지하게 하면서 국력을 서서히 소진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고구려의 국운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건만, 연개소문은 657년 10월 7일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며 세상을 떠났다.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었다. 이후 660년 7월 백제가 당군 13만과 신라군 5만으로 구성된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정세는 급변하였다. 서쪽과 남쪽에서 동시에서 공격을 받게 된 고구려는 662년 정월 평양 인근의 사수蛇水 유역에서 당의 장수 방효태龐孝泰와 그 아들 열세 명을 포함한 당군 전원을 몰살시키기도 하였다. 백제가 망하고 고립된 상황에서도 당의 대군을 맞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워 이겨 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공백은 국력 통합의 구심점이 공백을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그의 아들과 동생의 권력 투쟁으로 변했다. 큰아들 남생은 동생들과 분쟁을 벌이다가 적국인 당에 투항했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당과 신라의 연합군은 668년 평양성을 공격했으며 내분으로 인해 마침내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이러한 역사 과정의 결과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은 그를 저주하고 두려워한 당唐의 기록만 남게 되었고, 우리는 지금까지도 당의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나라가 망하느냐 존속하느냐 하는 비상시국에서 고구려의 자존을 지키며 존속을 이루어 낸 지도자였다. 이런 그를 단재 신채호는 우리 4천 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으로 평가하고 있다.
북방의 강자 돌궐제국사552년 몽골 초원에 새로운 패자가 등장했다. 기록에 따르면 돌궐突厥이라고 되어 있으니 그들의 본명은 튀르크Türk이다. 앞서 초원을 지배한 유연柔然은 몽골어를 사용했지만, 이들은 투르크어를 사용했다. 오늘날 이 언어를 쓰는 사람은 서쪽으로는 터키에서 동쪽으로는 중국령 신강위구르자치구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이들은 서쪽으로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 몽골과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에 강력한 제국을 세웠다. 제국의 건국자는 토문土門으로 이는 투르크어 ‘만萬’을 뜻하는 투멘Tümen을 옮긴 말이다. 만호장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본래 몽골족 국가로 알타이 지역에서 주로 야금 일에 종사하였다. 철광석을 제련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금속 가공에 뛰어난 솜씨를 보인 이들은 유연을 멸망시켰다. 건국자 토문이 죽자 아들 형제에 의해 둘로 나뉜다. ‘카간’이 된 장남 무한은 몽골 지역을 차지하여 동돌궐을 세웠고, ‘야브구’라는 칭호를 쓴 아우 이스테미는 중앙아시아 일대에 서돌궐을 세웠는데, 이로서 돌궐은 흉노에 비해 그 영역이 서쪽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서돌궐은 사산 왕조와 연합하여 헤프탈을 멸망시킨 뒤 아무다리야를 경계로 영토를 분할하였다. 주된 관심사는 막대한 중개 이익을 주는 비단 교역이었다. 경제적 이권 때문에 사산 왕조와는 대립 관계가 되었고, 돌궐은 더 서쪽인 비잔티움 제국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돌궐의 건국 집단은 원래 투르판 부근에 살았는데, 유연을 격파한 뒤 중심지를 몽골 서부의 외튀켄 산지(오늘날의 항가이 지방)로 옮겼다. 카간은 한 지점에서 광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제국을 셋으로 분할하여 지배하였다. 과거 흉노가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동서에 좌우현왕을 두는 방식과 비슷하고, 단군조선의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와 유사하다.
당시 중국 북부에는 북제와 북주가 서로 대립하며 경쟁적으로 돌궐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고, 돌궐은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이러한 상황을 잘 활용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 권력의 약화와 분권화 현상을 초래하였다. 지배 집단 내부에서 벌어진 격렬한 대립과 반목은 제국의 안정적 발전을 저해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618년 당唐이 건국될 시점에 동돌궐은 시필카간始畢可汗의 치세였다. 당시 ‘동쪽으로는 거란에서 서쪽으로는 토욕혼과 고창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라들이 신속하며 활을 쏘는 자가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은 돌궐에 칭신하였고,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당태종은 돌궐을 상대로 이간책을 사용하였다. 돌궐은 내분 격화와 수년에 걸친 대설로 가축들이 폐사하는 자연재해를 입으며 급격히 쇠약해졌다. 이를 간파한 당태종은 630년 초 내몽골에 있던 근거지를 급습하여 힐리카간을 생포하여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반세기에 걸쳐 당 제국의 지배를 받던 돌궐은 670년대 후반부터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682년 아사나阿史那씨 출신의 쿠틀룩이라는 인물이 거병하여 내몽골의 초가이 산지와 반半 사막 지대 카라쿰에 근거를 두고 흩어진 돌궐인을 모아 제국을 재건하였다. 제2 돌궐제국이었다. 하지만 752년 그 지배하에 있던 위구르Uyghur, 바스밀, 카를룩 세 부족의 반란으로 붕괴되었다. 돌궐의 후예들은 북방의 초원을 떠나 서진하여 이란 지역에 가즈나 왕조(975년~1187년)를 세우고, 11세기에는 동로마 제국으로 침투하여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세워(1037년)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지배하였다. 1299년에는 오스만 튀르크 왕조를 세우고 14세기 말에는 발칸 반도까지 장악하였다.
돌궐은 흉노와 몽골 사이를 잇는 초원의 패자로 만약 지배층의 내분과 자연재해 등이 없었다면, 몽골 제국의 역사는 돌궐 제국에서 먼저 시작되었을 것이다. 돌궐은 최강의 전투력을 지녔기 때문에 당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기 전에 먼저 돌궐을 복속시키려 했다. 고구려는 돌궐의 설연타薛延陀족과 동맹을 맺었고, 실제로 설연타는 1차 고구려 당나라 전쟁에서 장안을 급습하였다. 그 결과 안시성에서 발목이 잡힌 당태종은 서둘러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이 영류제榮留帝를 시해한 패륜아라는 굴레를 씌운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세계관의 충돌에서 비롯되었다. 고구려 27세 영류제는 즉위 후 당과 친선 외교를 고수하였다. 물론 수나라와 대전을 겪은 뒤이기에 전략적으로 친선을 도모할 필요는 인정할 수 있지만, 당에게 고구려의 봉역도封域圖(강역도)를 바친 일(628년)이나, 당의 고구려 침입 때 당의 후방을 견제해 줄 수 있는 세력인 돌궐 주력군이 당에 의해 격파되고, 힐리가칸이 사로잡혔을 때 수수방관한 부분은 굴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631년 대수對隋 전승기념탑인 경관京觀을 당의 요청에 의해 헐어 버렸기 때문에, 강력한 상무 정신을 가진 연개소문 같은 대당 강경파들의 격렬한 반발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던 중 642년 정월 영류제는 막리지인 연개소문에게 장성長城[주5]을 쌓는 역사를 감독하게 했다. 고구려의 막리지莫離支는 군사와 정치를 총리總理하는 비상시국 최고 관직이다. 이런 위치에 있는 이를 한직으로 보냄으로써 대당 강경 세력을 무력화하려 했다. 이에 때를 보던 연개소문 일파는 정변을 일으켰다. 이는 대당 굴욕 외교로 일관한 영류제와 그 세력에 대한 연개소문과 대당 강경파의 혁명 기의였다. 이는 다른 세계관을 가진 세력에 의한 혁명이었다. 즉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닌 정치 세력이었다면, 영류제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포기하고 당 제국에 복속됨으로써 존속을 도모하는 정치 세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연개소문은 정변 당시 임금을 시해하지 않았다. 변고를 전해 들은 영류제는 몰래 달아나 송양松壤에서 군사를 모으려고 했다. 송양은 현재 평안도 강동군 대박산으로 구을단군의 능이 있는 곳이며 고주몽 성제가 다물도多勿都로 삼은 곳이다. 하지만 영류제는 자신의 의도에 응하는 이가 없자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하였다.
대당전쟁의 총사령관
정변 후 연개소문은 보장제寶臧帝를 제위에 모셨다. 그는 모든 법을 공정무사한 대도로 집행함으로써, 자신을 성취하고 완성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고(성기자유成己自由), 만물의 이치를 깨쳐 차별이 없는(개물평등開物平等) 나라를 만들었으며, 조의선인들에게 계율을 지키게 하였다. 또한 무조건적인 강경책을 펴지는 않았다. 당의 국교인 도교 수입을 자청하여 독자적인 천하관을 유지하면서도 전술의 유연성을 택하는 정치가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보장제 개화 4년에 벌어진 국운을 건 당태종과의 전쟁을 총지휘하였고, 안시성 혈투를 지원하였으며, 조의들을 지휘하면 신출귀몰하게 전략을 구사하여 마침내 승리를 이끌어 냈다. 세계 최강대국 당이 전 국력을 기울여 쳐들어온 전쟁을 당당하게 승리로 이끌어 고구려를 구해 낸 용장이자 영웅인 것이다.
그 후
당태종 사후 고구려와 당 사이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당은 수시로 고구려를 침입하여 고구려가 항시적인 전시 상태를 유지하게 하면서 국력을 서서히 소진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고구려의 국운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건만, 연개소문은 657년 10월 7일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며 세상을 떠났다.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었다. 이후 660년 7월 백제가 당군 13만과 신라군 5만으로 구성된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정세는 급변하였다. 서쪽과 남쪽에서 동시에서 공격을 받게 된 고구려는 662년 정월 평양 인근의 사수蛇水 유역에서 당의 장수 방효태龐孝泰와 그 아들 열세 명을 포함한 당군 전원을 몰살시키기도 하였다. 백제가 망하고 고립된 상황에서도 당의 대군을 맞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워 이겨 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공백은 국력 통합의 구심점이 공백을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그의 아들과 동생의 권력 투쟁으로 변했다. 큰아들 남생은 동생들과 분쟁을 벌이다가 적국인 당에 투항했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당과 신라의 연합군은 668년 평양성을 공격했으며 내분으로 인해 마침내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이러한 역사 과정의 결과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은 그를 저주하고 두려워한 당唐의 기록만 남게 되었고, 우리는 지금까지도 당의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나라가 망하느냐 존속하느냐 하는 비상시국에서 고구려의 자존을 지키며 존속을 이루어 낸 지도자였다. 이런 그를 단재 신채호는 우리 4천 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으로 평가하고 있다.
북방의 강자 돌궐제국사552년 몽골 초원에 새로운 패자가 등장했다. 기록에 따르면 돌궐突厥이라고 되어 있으니 그들의 본명은 튀르크Türk이다. 앞서 초원을 지배한 유연柔然은 몽골어를 사용했지만, 이들은 투르크어를 사용했다. 오늘날 이 언어를 쓰는 사람은 서쪽으로는 터키에서 동쪽으로는 중국령 신강위구르자치구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이들은 서쪽으로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 몽골과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에 강력한 제국을 세웠다. 제국의 건국자는 토문土門으로 이는 투르크어 ‘만萬’을 뜻하는 투멘Tümen을 옮긴 말이다. 만호장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본래 몽골족 국가로 알타이 지역에서 주로 야금 일에 종사하였다. 철광석을 제련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금속 가공에 뛰어난 솜씨를 보인 이들은 유연을 멸망시켰다. 건국자 토문이 죽자 아들 형제에 의해 둘로 나뉜다. ‘카간’이 된 장남 무한은 몽골 지역을 차지하여 동돌궐을 세웠고, ‘야브구’라는 칭호를 쓴 아우 이스테미는 중앙아시아 일대에 서돌궐을 세웠는데, 이로서 돌궐은 흉노에 비해 그 영역이 서쪽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서돌궐은 사산 왕조와 연합하여 헤프탈을 멸망시킨 뒤 아무다리야를 경계로 영토를 분할하였다. 주된 관심사는 막대한 중개 이익을 주는 비단 교역이었다. 경제적 이권 때문에 사산 왕조와는 대립 관계가 되었고, 돌궐은 더 서쪽인 비잔티움 제국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돌궐의 건국 집단은 원래 투르판 부근에 살았는데, 유연을 격파한 뒤 중심지를 몽골 서부의 외튀켄 산지(오늘날의 항가이 지방)로 옮겼다. 카간은 한 지점에서 광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제국을 셋으로 분할하여 지배하였다. 과거 흉노가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동서에 좌우현왕을 두는 방식과 비슷하고, 단군조선의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와 유사하다.
당시 중국 북부에는 북제와 북주가 서로 대립하며 경쟁적으로 돌궐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고, 돌궐은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이러한 상황을 잘 활용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 권력의 약화와 분권화 현상을 초래하였다. 지배 집단 내부에서 벌어진 격렬한 대립과 반목은 제국의 안정적 발전을 저해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618년 당唐이 건국될 시점에 동돌궐은 시필카간始畢可汗의 치세였다. 당시 ‘동쪽으로는 거란에서 서쪽으로는 토욕혼과 고창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라들이 신속하며 활을 쏘는 자가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은 돌궐에 칭신하였고,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당태종은 돌궐을 상대로 이간책을 사용하였다. 돌궐은 내분 격화와 수년에 걸친 대설로 가축들이 폐사하는 자연재해를 입으며 급격히 쇠약해졌다. 이를 간파한 당태종은 630년 초 내몽골에 있던 근거지를 급습하여 힐리카간을 생포하여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반세기에 걸쳐 당 제국의 지배를 받던 돌궐은 670년대 후반부터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682년 아사나阿史那씨 출신의 쿠틀룩이라는 인물이 거병하여 내몽골의 초가이 산지와 반半 사막 지대 카라쿰에 근거를 두고 흩어진 돌궐인을 모아 제국을 재건하였다. 제2 돌궐제국이었다. 하지만 752년 그 지배하에 있던 위구르Uyghur, 바스밀, 카를룩 세 부족의 반란으로 붕괴되었다. 돌궐의 후예들은 북방의 초원을 떠나 서진하여 이란 지역에 가즈나 왕조(975년~1187년)를 세우고, 11세기에는 동로마 제국으로 침투하여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세워(1037년)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지배하였다. 1299년에는 오스만 튀르크 왕조를 세우고 14세기 말에는 발칸 반도까지 장악하였다.
돌궐은 흉노와 몽골 사이를 잇는 초원의 패자로 만약 지배층의 내분과 자연재해 등이 없었다면, 몽골 제국의 역사는 돌궐 제국에서 먼저 시작되었을 것이다. 돌궐은 최강의 전투력을 지녔기 때문에 당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기 전에 먼저 돌궐을 복속시키려 했다. 고구려는 돌궐의 설연타薛延陀족과 동맹을 맺었고, 실제로 설연타는 1차 고구려 당나라 전쟁에서 장안을 급습하였다. 그 결과 안시성에서 발목이 잡힌 당태종은 서둘러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창업과 수성의 심법전수, 정관정요貞觀政要당태종과 그를 보좌한 명신들의 대화로 구성된 책이 『정관정요貞觀政要』이다. 이 책은 주자가 사서四書를 엮기 이전까지 동아시아에서는 정치의 지침서로 활용되었다. 이 책에는 공자의 덕치와 노자의 무위지치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즉 창업과 수성의 논리가 집약돼 있는데, 법가의 패도를 추종한 방현령이 창업을 강조하였다면, 유가의 왕도를 추종한 위징은 수성을 강조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방현령은 옛날 짐을 따라 정천하定天下를 할 때 온갖 고초를 두루 맛보고 만 번 죽을 고비를 넘겨 간신히 살아온 까닭에 초창의 어려움을 보았고, 위징은 짐과 더불어 안천하安天下를 하면서 교만과 방종의 단서가 생겨나 필히 위망의 정황으로 나아갈까 염려하는 까닭에 수성의 어려움을 본 것이다. 지금 초창의 어려움은 이미 지나갔으니 앞으로 수성의 어려움은 응당 공들과 함께 신중히 대처해 나가도록 할 생각이다.”고 했다. (정관정요 군치론)
당태종 자신이 창업과 수성을 모두 경험했기에 이런 말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 둘을 성공시킬 수 있는 핵심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늘 겸손한 자세로 스승과 친구를 곁에 두고 천하에 임하는 이른바 사우師友 정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당태종처럼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은 자부심이 크다. 이는 자만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제왕의 자만심은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그래서 늘 곁에서 충고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경륜이 높은 원로를 스승으로 모시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곁에 두어야 한다. 사우는 이런 스승 또는 친구 같은 신하를 뜻한다.
당태종은 재위 기간 연호를 정관 하나만 사용하였다. 정관은 주역 계사전 하 1장에 나오는 천지지도天地之道는 정관자야貞觀者也에서 따왔다. 이는 천지의 도는 바르게 관찰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천하 쟁패와 처참한 골육상쟁으로 옥좌에 올랐기에 바른 안목을 갖고 태평 시대를 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정관정요』의 편찬자는 사관 오긍吳兢으로 천품이 강직하고 과묵하며 해박한 지식을 지녔고 직간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책을 집필하면서 모든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는 춘추필법春秋筆法을 고수하여, 당태종의 장점과 단점이 적나라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는 최고통치권자인 제왕의 잘못된 행동은 백성뿐 아니라 나라의 존망에 큰 영향을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정관정요』는 모두 10권 40편으로 되어 있다.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권 「군치론君治論」은 군주가 갖추어야 할 도리와 정치의 근본에 관해 논하고 있다. 제2권 「규간론規諫論」은 현량한 관원과 간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제3권 「감계론鑑戒論」은 군신이 지켜야 할 계율, 관원의 선발 등을 집중 거론하고 있다. 제4권 「태자론太子論」은 태자와 여러 왕을 경계하는 내용이 실려 있고, 제5권 「공덕론公德論」은 유가의 기본 덕목인 충효와 믿음, 공평 등을 다루고 있다. 제6권 「수신론修身論」은 절약과 겸양 등 수신제가 덕목을 심도 있게 논하고 있다. 제7권 「학예론學藝論」은 유학의 중요성과 문학 및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주문하고 있다. 제8권 「민생론民生論」은 내치의 요체인 민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농업과 형법, 부역, 세금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제9권 「국방론國防論」은 외치의 핵심인 대외 원정과 변경 안정 등의 국방 문제를 깊이 다루고, 제10권 「군덕론君德論」은 군주의 순행과 사냥 등 군주가 명심해야 할 구체적인 덕목을 언급해 놓고 있다.
<참고문헌>
『역주 환단고기』 (안경전, 상생출판, 2012)
『조선상고사』 (신채호,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7)
『당태종과 이십사장』 (이재석, 상생출판, 2010)
『인물지:제왕들의 인사 교과서』 (박찬철, 공원국, 위즈덤하우스, 2009)
『영웅의 역사 7 대제국의 황제 당태종 』(마루야마 마츠유키 지음, 윤소영 옮김, 솔출판사, 2000)
『정관정요, 부족함을 안다는 것』 (신동준, 위즈덤하우스, 2013)
『그 위대한 전쟁 1,2』 (이덕일, 김영사, 2007)
『세상의 모든 혁신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임용한, 교보문고, 2014)
『역사스페셜 6 전술과 전략 그리고 전쟁, 베일을 벗다』 (KBS 역사스페셜,효형출판, 2003)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김호동, 사계절, 2016)
『돌궐유목제국사』 (정재훈, 사계절, 2016)
『종횡무진 동양사』 (남경태, 그린비, 2013)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황원갑, 인디북, 2004)
『아틀라스 중국사』(박한제 등, 사계절 출판사, 2008)
『절기서당』 (김동철, 송혜경, 북드라망, 2013)
『변경辨經』 (렁청진, 김태성 역, 더난출판, 2003)
『한민족전쟁사』 (온창일, 지문당, 2001)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이덕일, 역사의 아침, 2007)
『연개소문을 생각한다』 (강준식, 아름다운 책, 2004)
『도올의 중국일기 4』 (김용옥, 통나무, 2015)
청야전술은 적군의 손에 들어간다면 사용할 만한 모든 물자를 없애 버리며, 적의 보급을 어렵게 했다. 공격군에게는 전쟁을 해도 얻을 게 없다는 정신적 공황을 야기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심각한 후유증이 있다. 적에게 넘길 모든 것을 없애 버렸기 때문에 전후 피해가 막심해진다는 점이다. 실제로 고구려는 이후 수당제국과의 연이은 전쟁에 청야전술을 사용하였는데, 이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 졌다.
당태종 자신이 창업과 수성을 모두 경험했기에 이런 말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 둘을 성공시킬 수 있는 핵심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늘 겸손한 자세로 스승과 친구를 곁에 두고 천하에 임하는 이른바 사우師友 정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당태종처럼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은 자부심이 크다. 이는 자만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제왕의 자만심은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그래서 늘 곁에서 충고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경륜이 높은 원로를 스승으로 모시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곁에 두어야 한다. 사우는 이런 스승 또는 친구 같은 신하를 뜻한다.
당태종은 재위 기간 연호를 정관 하나만 사용하였다. 정관은 주역 계사전 하 1장에 나오는 천지지도天地之道는 정관자야貞觀者也에서 따왔다. 이는 천지의 도는 바르게 관찰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천하 쟁패와 처참한 골육상쟁으로 옥좌에 올랐기에 바른 안목을 갖고 태평 시대를 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정관정요』의 편찬자는 사관 오긍吳兢으로 천품이 강직하고 과묵하며 해박한 지식을 지녔고 직간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책을 집필하면서 모든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는 춘추필법春秋筆法을 고수하여, 당태종의 장점과 단점이 적나라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는 최고통치권자인 제왕의 잘못된 행동은 백성뿐 아니라 나라의 존망에 큰 영향을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정관정요』는 모두 10권 40편으로 되어 있다.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권 「군치론君治論」은 군주가 갖추어야 할 도리와 정치의 근본에 관해 논하고 있다. 제2권 「규간론規諫論」은 현량한 관원과 간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제3권 「감계론鑑戒論」은 군신이 지켜야 할 계율, 관원의 선발 등을 집중 거론하고 있다. 제4권 「태자론太子論」은 태자와 여러 왕을 경계하는 내용이 실려 있고, 제5권 「공덕론公德論」은 유가의 기본 덕목인 충효와 믿음, 공평 등을 다루고 있다. 제6권 「수신론修身論」은 절약과 겸양 등 수신제가 덕목을 심도 있게 논하고 있다. 제7권 「학예론學藝論」은 유학의 중요성과 문학 및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주문하고 있다. 제8권 「민생론民生論」은 내치의 요체인 민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농업과 형법, 부역, 세금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제9권 「국방론國防論」은 외치의 핵심인 대외 원정과 변경 안정 등의 국방 문제를 깊이 다루고, 제10권 「군덕론君德論」은 군주의 순행과 사냥 등 군주가 명심해야 할 구체적인 덕목을 언급해 놓고 있다.
<참고문헌>
『역주 환단고기』 (안경전, 상생출판, 2012)
『조선상고사』 (신채호,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7)
『당태종과 이십사장』 (이재석, 상생출판, 2010)
『인물지:제왕들의 인사 교과서』 (박찬철, 공원국, 위즈덤하우스, 2009)
『영웅의 역사 7 대제국의 황제 당태종 』(마루야마 마츠유키 지음, 윤소영 옮김, 솔출판사, 2000)
『정관정요, 부족함을 안다는 것』 (신동준, 위즈덤하우스, 2013)
『그 위대한 전쟁 1,2』 (이덕일, 김영사, 2007)
『세상의 모든 혁신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임용한, 교보문고, 2014)
『역사스페셜 6 전술과 전략 그리고 전쟁, 베일을 벗다』 (KBS 역사스페셜,효형출판, 2003)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김호동, 사계절, 2016)
『돌궐유목제국사』 (정재훈, 사계절, 2016)
『종횡무진 동양사』 (남경태, 그린비, 2013)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황원갑, 인디북, 2004)
『아틀라스 중국사』(박한제 등, 사계절 출판사, 2008)
『절기서당』 (김동철, 송혜경, 북드라망, 2013)
『변경辨經』 (렁청진, 김태성 역, 더난출판, 2003)
『한민족전쟁사』 (온창일, 지문당, 2001)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이덕일, 역사의 아침, 2007)
『연개소문을 생각한다』 (강준식, 아름다운 책, 2004)
『도올의 중국일기 4』 (김용옥, 통나무, 2015)
[주1]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동호 즉 퉁구스계에 속하는 선비족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후한서』에는 선비와 오환을 모두 동호東胡, 즉 번조선의 후예라고 했다. 『위서』에서는 선비족의 발상지를 대선비산大鮮卑山(대흥안령 일대)으로 산 이름에서 족명을 취했다고 한다. 북흉노가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이동해 흉노의 본거지인 몽골 고원이 일시적인 공백 지대가 되자 패권을 다투던 여러 족속 중 선비족이 패권을 잡았다.[주2]
견벽청야입보堅壁淸野入保 전략 - 전쟁 때 방어 측에서 사용하는 대표적 전술로 청야수성淸野守城이라고도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요새와 군량미, 주민들의 호응과 더불어 적의 보급로와 후방을 교란시킬 기병이 존재해야 했다. 이 점에서 고구려는 완벽한 전술을 구사했다.청야전술은 적군의 손에 들어간다면 사용할 만한 모든 물자를 없애 버리며, 적의 보급을 어렵게 했다. 공격군에게는 전쟁을 해도 얻을 게 없다는 정신적 공황을 야기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심각한 후유증이 있다. 적에게 넘길 모든 것을 없애 버렸기 때문에 전후 피해가 막심해진다는 점이다. 실제로 고구려는 이후 수당제국과의 연이은 전쟁에 청야전술을 사용하였는데, 이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 졌다.
[주3]
대장부大丈夫 - 출처는 『맹자』 「등문공 하」에 나온다. 내용은 이렇다. ‘천하의 넓은 집(仁)에 거처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禮)에 서며, 천하의 대도(義)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를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하여, 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며, 빈천이 절개를 옮겨 놓지 못하며, 위무가 지조를 굽히게 할 수 없음을 일러 대장부라 한다’.[주4]
조의선인皁衣仙人- 조의는 삼신 상제님의 진리, 즉 한민족의 신교 낭가사상으로 무장한 종교적 무사 집단이다. 조의는 개인적인 완성이 아니라 공도公道와 국가, 민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도 같이 내던지는 살신성도殺身成道를 이상과 목적으로 삼는다. 평상시에는 삼신 상제님의 신교 진리를 터득하여 완전한 인격자의 길을 추구하고, 심신과 학문을 닦으며 무예를 연마하다가 유사시에는 항상 선봉에 서서 목숨을 걸고 국가의 위급을 구하였다. 조의의 계율은 참전계參佺戒로 충인의지예忠仁義智禮이다.[주5]
중국의 만리장성 같은 방벽은 어느 한쪽이 뚫리면 그 기능을 상실한다. 그래서 고구려의 장성은 요동 지역에 있던 100여 개 고구려 성들의 협조 연락 체계와 방어망 정비로 봐야 할 것이다. 한 성이 함락되어도 다른 성들이 계속해서 협조하면서 방어진을 펼 수 있다.[주6]
당 건국 초기 최대 왕위 쟁탈전인 ‘현무문의 변’ 때 이세민은 형 건성과 아우 원길 그리고 조카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아버지 이연을 강제로 왕위에서 몰아내고, 아우 원길의 아내(楊氏: 수양제의 둘째 딸)를 황비로 삼았다. 후에 문덕황후 장손씨가 죽자 양씨를 황후로 삼으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단념하게 되었다.©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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