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 최태영 공저
이병도(1896~1989)
경기도 용인군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17세)에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였고, 그 이듬해 와세다대학에서 사학 및 사회학과를 전공했다. 그가 역사를 배운 곳은 한국이 아닌 일본이었다. 훗날 최태영은 이병도의 역사관에 대해서 이런 말을 남겼다. “한번 일본인들에게 설득당한 사람은 아주 모르는 사람보다 더 힘들다.”
1925~1927까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을 했고 1955~1982년까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실증사학’이라는 취지 아래 역사 왜곡에 혼신을 다하던 그는 사학자 장도빈이 <조선사편수회 사업 개요>를 인용해 이병도의 식민사관과 경력을 폭로한 내용이 박창암 장군의 글로 1980년 일본 도쿄신국민사 발행의 <역사와 연대>지誌에 발표되어 심적으로 흔들리고 있던 차에, 최태영 박사의 권유로 다행스럽게도 1986년 10월 9일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 국조-역대 왕조의 단군 제사, 일제 때 끊겼다.”라는 제목으로 단군조선 실재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최태영(1900~2005)
“내가 직접 역사 연구에 나선 것은 우리 역사학자들(정인보, 신채호, 안재홍, 손진태, 최동, 장도빈)이 몽땅 북으로 잡혀가고 죽었는데 강단에서는 광복 이후에도 우리 역사를 일본이 만든 그대로 가르친다는 것을 알고 크게 놀라 그렇다면 나라도 해야 되지 않겠나 한 것뿐이다.”
- 나의 근대사 회고 / 최태영 저, 김유경 정리
그는 대한민국 법령의 기초를 다진 법학자이다. 서울대, 경희대에서 법대 학장을 지내고 경희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이고 국내 최초로 상법과 관련된 <현행 어음 수표법>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1900년에 태어나 2005년 작고하시기까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한 세기를 사신 그야말로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의 행적을 쫓아가다 보면 백범 김구 선생님부터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한두 명씩 나온다.
이런 그가 한국 법철학을 연구하면서 우리 조상들의 사상과 한국사에 주목해 왔고, 대한제국이 망한 뒤에는 바로 대학 선생이 되어 넓게 공부하면서 법철학과 연관된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어 본격적인 역사 연구로 이어졌다.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는데 그 근처에 구월산이 있다. 구월산에는 삼성조를 모신 삼성사가 있다.
[들어가는 글]
요동에 하나의 별천지가 있으니, 중국과 완전히 구분되어 삼면이 큰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로 둘러싸이고 북녘은 대륙에 연한 중방中方 1천 리, 이것이 조선이다. 아름답고 예의를 아는 나라이다. 환국에서 환웅이 온 인류를 크게 이롭게 할 만하므로 (환웅으로 하여금)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아래로 내려보냈다. 그의 아들이 조선이란 나라를 세운 단군이다. 시라, 고례, 남북 옥저, 동북 부여, 예와 맥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
- 동국세년가東國世年歌(세종 18년), 권제
‘세년가世年歌’라 함은 노래로 역사의 사적을 엮어 입과 입으로 전하는 일종의 시가다. 이것은 전승의 흔적이며 역사의 유구함이다. 이 세년가에는 곰의 자손이니 호랑이의 끈기 같은 동물의 세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 한 나라의 건국 이야기에 금수를 집어넣은 그 금수만도 못한 녀석들은 대체 누구인가? 어떻게 그 나라의 조상을 얘기하는 자리에 동물이 사람 되고 그 사람이 또 사람을 낳는다는 막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원래의 역사를 모르는 이도 이 정도인데, 원래의 역사를 아는 이의 비통함은 어찌 헤아릴까? 이것은 사실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다. 양심과 비양심의 문제다.
이 책의 구성
이 책은 크게 본문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다시 역사에 대한 총설과 고조선(단군조선)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부록은 삼국 시대부터 해서 고려 시대까지의 역사를 간략 정리해 놓은 부록 1과 일본에 역사를 전해 준 것이 한민족이라는 것을 일본의 왕조사를 들어서 설명해 놓은 부록 2로 나뉘어져 있다.
주요 문장
■최태영 박사의 역사관
과오와 결점을 알아서 다시는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고 개선 향상하려는 데서 진보와 발달이 생기고 거기서 위대한 문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11쪽)
사실을 고립적 표본으로 고찰해서는 안 된다. (12쪽)
‘사실’은 정형화되어 있지 아니하다. 사실은 각각의 사건에 대해서 유기적으로 변화한다. 사실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표현하는 모습이 변화하는 것이다.
과거는 현재의 뿌리요, 현재는 과거의 성과이며, 과거 생활 중에는 현재에 대한 양분이 깃들어 있는 까닭이다. (13쪽)
최태영 박사의 역사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정의를 외치는 법학자로서 거짓된 과거로 인해 거짓으로 오염되는 현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배달국의 흔적
청천강을 경계로 하여 그 북부의 한반도와 만주 지역은 밑이 편편한 빗살무늬 질그릇이 주류이고, 그 이남 지역은 밑이 편편한 것과 밑이 뾰족한 빗살무늬 질그릇이 혼재되어 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청천강 이북 지역의 밑이 편편한 질그릇은 그 초기의 전형적인 것들이 백두산 주변에 분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31쪽)
이것은 책에서도 밝혔듯이 이 문화가 백두산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백두산 신시 시대를 연 배달국 문명의 흔적이다.
개천절의 개천은 군장을 개설한다는 것이 되므로 개국(건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42쪽)
음력 10월 3일은 단군보다 먼저 거발환환웅이 신시를 연 날이다.
단군은 환웅을 따라서 같은 날에 단군조선을 연 것이다. 개천이 개국을 의미한다면 이날은 바로 배달국이 열린 날이고 우리 민족의 최초의 국가는 단군조선이 아닌 배달국이다.
■단군조선
단군을 국조로서 사당을 세우고 최고의 조상으로 제사를 받들어 왔는데, 그것이 끊어진 것은 일제의 강점 때부터였다. #신화나 전설에 지나지 아니한다면 이처럼 역대 왕조에서 조의朝議에 의하여 건묘, 봉제사하지는(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실존 인간 단군과 영구한 역사를 이어 온 고조선에 관하여는 더 연구할지언정 신화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 이병도박사 (44쪽)
이병도 박사는 본인 스스로가 단군은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고조선 왕국의 통치 방법은 군사력에 기초한 무력, 행정조직을 중심으로 한 정치력 등이 주요한 역할을 하였겠지만, 그것은 종교적 권위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71쪽)
왜 역사를 공부하는데 종교를 이야기하는가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겠다. 당시에 통치 방법이 종교적이었기 때문이다. 지배 윤리나 이념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종교적인 예를 들지 않고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기자조선
기자가 오기 전에 단군조선은 이미 선진국을 이루었으므로 그 연대로 보아서 기자가 조선에 옴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조선에 윤리, 도덕적 사상, 법규범과 문화가 전해졌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88쪽)
기자조선의 허구를 지적한 구절이다. 소위 기원전 12세기에 기자가 설혹 단군조선에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이미 단군조선은 선진 국가였기 때문에 기자가 단군조선에 끼일 틈이 없다는 것이다.
유승국 씨는 일본의 학자 이마니시류 등도 한인韓人의 입장과 다른 면에서 “기자조선에 대하여, 낙랑 지방의 호족인 한씨가 자기네의 가계를 수식하려고 기자조선을 논한 것이라고 기자조선의 실재를 부인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89쪽)
청주 한씨에서 가문의 정통성을 위해서 기자조선을 내세웠다고 하는데, 그 누구도 아닌 이마니시류가 한 얘기라는 것이 놀랍다.
■한사군
B.C.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낙랑 진번 임둔의 3군을 설치한 다음 여세를 몰아 고조선 왕국의 서부를 공략하여... (97쪽)
위만조선이 무너진 자리에 한사군 중 3군이 설치된 것을 설명하였다.
요하와 한반도에 같은 지명이 붙은 지역이 있어서, 한사군이 한반도의 평양과 황해도에 있었던 것처럼 오해하게 되었다.
원래 위만조선에 설치된 낙랑을 위시하여 한사군은 북경 접경에 있었는데 그것이 한반도 내의 평양과 황해도에 있었던 것으로 잘못된 생각을 하는 데는, 조선의 열국의 하나인 최리崔理의 낙랑국이 평양 가까이에 있었던 것과 중국이 난하 유역의 낙랑군과 같은 이름의 낙랑이라고 불려진 후방의 군사기지를 만들고, 또 한때 황해도 지역에도 대방이라는 난하 유역의 대방군과 같은 이름의 소규모의 후방의 군사기지를 만들었다가 토착민들의 저항을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한인漢人의 약간의 유적과 유물이 발굴 발견되는 데서 생겨나는 있을 수 있는 그릇된 판단에서 오는 결과인 것이다. (100쪽)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잘 범하기 쉬운 오류이다. 한 지명에 오직 한 장소만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임나일본부
고구려 왕실은 백제에 대한 원한 때문에 외지에 있던 백제 왕자들 연합군의 반도 상륙을 왜군의 침공인 것처럼 표현한 구절이 있어서 왜군침입설 및 임나일본부설이 조작된 부분이 있다고 하고... (104쪽)
일본에 있던 백제 왕자들이 한반도에 들어온 사실을 고구려에서는 왜군의 침공으로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A.D. 670년에 비로소 일본이라는 나라의 명칭이 생겼으므로, A.D. 4세기나 5세기쯤에는 만의 하나 ‘임나왜부’라고 한다면 몰라도 ‘임나일본부’란 것이 있었을 수가 없다. (105쪽)
법학자다운 명쾌한 설명이다. 언어 사용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면 진의를 판단하는 데 용이하다.
■일본 왕조사
침략주의의 일본 권력층과 군부에 기생하는 학노學奴인 자칭 학자 교직자와 신직자들은 그 무모하고 엄청난 침략 전쟁의 실현에 방해를 받고 권력과 생활 자원인 직업을 잃게 될까 봐 진리와 진실을 위서와 역사의 파괴자로 몰아서 집요하게 반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168쪽)
일본 역사가 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우가야 왕조사와 관련된 문제를 언급한 부분인데, 우가야 왕조설은 일본의 천황가가 조선에서 이주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일본 열도 내의 자생왕조라는 허구에 대하여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이 한국의 사서들이었으므로, 조선총독부는 이미니시류를 중심으로 하여, 긴 세월에 걸쳐서 한국의 모든 사적 자료를 대규모로 약탈분서하고 쓰시마의 종가에 전하여 내려온 사서들도 몰수하여, 그것들을 궁내성의 문고 속에 감추었다. - 80년 여름 <역사와 현대>에 소개된 단군고기와 야마대국, 가시마鹿島舞 논술 (170쪽)
일본의 역사 왜곡 행위는 자신들의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점도 있었으나 자신의 왕조를 지키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나오는 글
최태영 박사는 단군조선의 강역을 반도 내로 줄이고 그 건국 연대를 절단한 것은 중국과의 사대 관계와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관의 조작이 낳은 결과라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중국과의 사대 관계와 한국 강점 시대의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정책으로 조작된 사관으로 인한 국사의 왜곡을 바로잡고 국사를 복원하려는 운동의 역점이 ①실존 인물 단군이 반만 년 전에 고조선국을 개창하여 현 중국의 요동을 중심으로 하여 크게 활약한 선진 광역국가였음을 사료에 의하여 밝히고, ②일인의 조작과는 반대로 후진국인 일본이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선진국인 한국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두 가지에 있는 것이라면, 고조선은 그 전후 양자 모두에 해당하고,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후자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후자의 시원이 일찍이 고조선 말의 민족의 이동과 관련되었음을 알아야 한다.”며 일본에 대한 단군조선의 역사적 우위를 강조함으로써 역사 왜곡 논쟁의 마침표를 찍었다. 단군을 되찾는 일, 그것이 모든 것을 바로잡게 하는 역사의 방향키다.
최태영 박사의 『환단고기』언급
‘환단고기’란 제목으로 묶인 5개의 역사서들은 국가적으로 보관되어 오던 비서임이 확실하다. 민간에 유통되지 않았다 해도 역대 왕조에는 이런 사료들이 귀중하게 보관돼 오는 게 전통이었다. 세종, 성종, 예종실록에서 삼성기, 삼성(비)밀기, 조대기, 고조선비사 등이 비장되어 있었음을 찾아냈는데, 그것이 대체로 일본 사람들이 태워서 없애 버린 여러 가지 문헌이자 『환단고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근대사 회고』 중에서
초고대사 연구가 아고 기요히코의 『환단고기』 평가
『환단고기』는 「단군세기」를 비롯해 「태백일사」 등 조선을 중심으로 한 비사이지만 만주, 몽고, 중국을 위시해 멀리 서역까지를 무대로 하는 상고사이다. 거란 고전과 아울러 읽으면 고대 일본 민족의 걸어온 길을 밝힐 수 있다. 「삼성기 전」과 「단군세기」의 첫머리에는 신화적 요소가 들어 있는데 이는 한민족의 우주관 세계관 또는 신관으로 연구될 만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환단고기』는 철학 종교의 서書이기도 하다. 그렇게 고찰할 때 『환단고기』는 사서로서 높이 평가되는 동시에 문화서로서도 독자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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