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본격적으로 조선총독부 사관을 살펴보자. 우선 일제는 ‘왜 『조선사』를 편찬했을까?’를 생각해 보자. 일제는 1930년대 중반 중일전쟁 직전의 경제적 압박 속에서도 『조선사』 35권 완간을 강행한 이유가 뭘까?
조선총독부 사관의 특징과 이를 정립시킨 인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1925년 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해 『조선사』 편찬에 나서서 1937년에 35권을 완간했다. 13년의 작업에는 방대한 조직과 인원이 동원되었으며 당시 돈으로 1백만 원이란 거대한 예산이 투입되었다. 지금으로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수백 억이나 되는 돈이다.
그럼 전쟁비용도 부족할 때 일제가 『조선사』 편찬을 강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조선 백성을 일본 왕의 신민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영원한 수탈의 대상이자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쓸 신민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럼 조선총독부는 어떻게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심어 놓았는가? 그들의 주장의 핵심은 무엇인가?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사를 타율성他律性과 정체성停滯性으로 규정했다. 또한 시·공간을 축소해 일본사보다 짧은 조선사, 한반도 속에 갇힌 조선사로 재단했다. 한마디로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사관’을 철저히 부정한 것이다. 그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민족의 뿌리를 단절시키기 위해 ‘단군신화’를 강조한다.
둘째, 위만조선을 부각시켜 중국의 선진문화를 전수받아 문명화되었음을 강조한다.
셋째, 평양 한사군설과 가야 임나일본부설을 강조해 식민지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앞서 살펴본 일제 강점기 보통학교 교과서의 흐름과 동일하다. 일제는 한민족의 시원사의 중심인 단군은 신화로 치부했고, 한반도의 북쪽은 중국 식민지, 남쪽은 일본 식민지로 틀을 잡고 그에 맞는 사료(문헌)와 유물을 집중 연구했다. 이를 통해 일제는 대한인은 원래 뿌리 없는 민족이며, 외부의 보호를 받아야 겨우 유지되는 못난 한반도인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렇듯 일제는 대한의 상고사를 난도질해 조선인의 역사적 긍지와 자부심부터 철저히 짓밟고 역사 혼을 거세시켰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실증사관이라는 옷을 입은 그들의 논리에 함몰돼 그들의 사관이 옳다고 주장하는 몇몇 매국賣國사학자가 아직도 있다는 것이다. 일제가 틀 잡아 놓은 식민사관이 유일한 정통사관이라 하는 그들의 손에 의해 대한의 미래인 중·고등 역사교과서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일제 식민사관의 논리를 세운 일본인 학자들
그럼 세 가지 항목을 일제는 어떻게 이 땅에 심어 놓았는지 검토해 보자.
첫째, 단군을 신화라 주장한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일본인들의 단군연구』에 수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간략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일본 식민사학자들은 단군을 한민족 상고사의 국통國統의 중심에 놓은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고조선」 조를 철저히 부정했다. 그러나 그들 주장은 합당한 논거가 없는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특히 조선사편수회 3인방의 막내인 금서룡(이마니시 류)의 글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금서룡은 조선총독부를 대표하는 학자로 부정을 위한 부정의 논리를 눈에 불을 켜고 찾은 사람이다. 금서룡은 「단군고檀君考」(1929)에서 ‘단군은 부루夫婁의 아들이며 주몽신화의 변형이 단군신화로 고려 인종(1122)부터 고종(1259) 사이에 만들어졌다.’라고 주장했다.
금서룡이 멋대로 주장한 내용의 원출처와 스토리는 이렇다.
『삼국유사』 「고구려」 조 동부여 해부루왕과 유화부인 관련 기사 중 일연 스님 주석부분
壇君記云(단군기운)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군여서하하백지녀요친) 有産子(유산자) 名曰夫婁(명왈부루)
『단군기』에는 “단군이 서하의 하백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아서 부루라고 했다.”라고 했다.
今按此記(금안차기) 則解慕漱私河伯之女而後産朱蒙(즉해모수사하백지녀이후산주몽)
지금 이 기록을 살펴보건대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은밀히 정을 통해서 주몽을 낳은 것이다.
壇君記云(단군기운) 産子名曰夫婁(산자명왈부루) 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부루여주몽이모형제야)
『단군기』에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했다.”라고 하니, 부루와 주몽은 배다른 형제이다.
찬찬히 읽어보면 일연 스님은 『단군기檀君記』의 ‘단군과 하백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부루’ 기록과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정을 통해 주몽을 낳았다는 기록을 비교하며 추론한다. 즉, 부루와 주몽은 ‘배다른 형제’가 아닌가 한 것이다. 그런데 두 기록은 부루와 주몽의 어머니의 본本이 ‘하백의 딸’이라는 공통된 사실을 전한 것뿐이다.
그런데 금서룡은 이를 이용한다. 금서룡은 단군사화檀君史話를 ‘주몽신화의 변형’으로 규정하기 위해 『삼국유사』에 인용된 일연스님의 내용을 제멋대로 해석하였다. 금서룡은 1차 사료를 모두 무시하며 다음과 같이 황당하게 추론한다.
① 단군 이야기는 신화다. 주몽신화의 변형일 뿐이다. (주몽 = 단군)
② 주몽의 아버지가 해모수라는 1차 사료는 못 믿는다. 주몽은 해부루왕과 하백지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③ 해부루왕의 아들이 주몽이니 ‘주몽신화의 변형인 단군신화의 주인공 단군’은 부루의 아들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악질 식민사학자 금서룡은 ‘1차 사료에 없는 말을 멋대로 조작·해석해 단군과 부루의 역사를 신화로 매도하고, 그것도 모자라 2,300년 후의 고구려 주몽신화의 변형으로 몰아붙였다. 역사의 머리를 잘라 꼬리에 갖다 붙인 것이다. 마치 앞과 뒤가 분간 안 되는 기형적인 괴물이 탄생한 모양새다. 해괴망측한 역사 장난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단군은 실재했다. 단군문화는 북부여와 고구려로 계승되었다. 또한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일연 스님은 당시 분명 존재했던 『위서魏書』를 인용해 ‘삼국유사 고조선 조’에서 ‘유有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고 서술한 점이다. ‘단군왕검이라는 분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시고 나라를 세워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단순 세속에 전해진 전설이 아닌 역사기록을 명시한 것이다.
둘째, 위만조선을 부각시켜 중국의 선진문화를 전수받아 문명화되었음을 강조한다는 것에 대해 살펴보자.
위만조선: 그 후 위만衛滿이라는 자가 이 지방에 와서, 기자의 후계자인 준準을 쫓아내고 나라를 빼앗았다.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 시기에, 한나라의 무제武帝가 이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에 사군四郡을 설치했다. (『일제 강점기 교과서』)
일제 강점기 교과서는 ‘나라를 빼앗았다’라고 하며 위만을 단군조선의 계승자로 놓는다. 일본 학자들은 위만이 기자의 후계자인 준(번조선 기준왕)의 나라를 빼앗고, 단군조선의 계승자가 되었다고 기술했다. 한마디로 대한 상고사 국통맥의 물길을 돌려 버렸다.
위만이 단군조선의 계승자라는 논리는 지나支那족 사마천의 『사기』에서 시작되었고, 소중화 사관을 가진 이 땅의 통치자와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완전히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환단고기』 등의 고유사서들은 위만을 단군조선의 정통 계승자가 아닌 도적으로 본다. 또한 뜻있는 민족사학자들은 1차 문헌을 연구해 잘못된 일제의 비정을 바로잡고 있다.
한마디로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후계 세력이 아닌 서부 변경의 정권이며, 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대한사관으로 보면 위만은 연나라에서 온 상투를 한 도적일 뿐이며, 단군조선의 정식 계승자로 칭송될 수 없다. 『맹자』에는 ‘적인자賊仁者 위지적謂之賊’이라는 구절이 있다. 즉, 왕이라도 ‘인을 해치는 자를 도적이라 부른다.’고 했다. 이 기준을 볼 때 위만은 아무리 일시적으로 문화를 발전시키고, 영토를 확장했다고 해도 연나라 망명자들의 앞잡이이자 도적일 뿐이다.
역사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후세에게 제대로 사실을 전해주고, 교훈을 가슴에 담아주기 위함이 아닌가.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도적질을 보고 배우면 도적이 되기 쉽다. 그런데 아직도 교과서에 이런 기회주의자, 배은망덕한 존재의 대명사인 위만을 단군조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왕으로 칭송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를 배우는 후손들이 무엇을 배울 것인가?
셋째, ‘평양 한사군설과 가야 임나일본부설을 강조해 식민지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부분을 살펴보자.
일제가 심어놓은 ‘평양 한사군설’의 실체
우선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대표적인 주장이자, 그들의 학맥을 계승한 이 땅의 매국사학자들의 밥줄인 ‘평양 한사군설’을 검토해 보자.
그들은 대동강의 평양지역이 위만정권의 수도 왕험성이었고, 이 지역을 한 무제 군대가 점령 후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양 = 낙랑군’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지금 이런 내용은 아직도 우리 중·고등학교 모든 교과서의 고대사 기술의 중심에 있다.
평양 한사군설을 이용해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조선반도는 원래 정체되었고, 외부 세력의 통제를 받아왔기에 일제에 의한 통치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강조한다. 즉, 못난 대한의 상고사는 조선반도를 벗어나지 않으며 북쪽은 중국 식민지, 남쪽은 일본 식민지라는 것이다. 일제는 이런 공식에 맞는 역사문헌과 유물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1906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라는 전위조직을 만들어 만주지역에 철도 부설을 핑계 삼아 한사군을 집중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 대동강 일대를 한사군의 중심인 낙랑군 지역으로 비정하였다. 그 중심에 ‘쓰다 소우키치’와 ‘이마니시 류’(금서룡)가 있다.
① 쓰다 소우키치 ‘패수 = 압록강설 주장’
패수의 이름은 『사기』 「조선열전」에 한나라 초기 고조선의 북쪽 경계로 기록되었고, 또 『한서』 「지리지」에 낙랑군 속현屬縣의 이름으로 기재되었다. 전자는 통상 압록강으로 이해되고 있다. (쓰다 소우키치 「패수고浿水考」 1913년, 일제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의뢰로 작성)
낙랑군의 남부에는 후한後漢 말에 이르러 대방군(지금의 경기, 황해도 지방)이 분치되었다. (『조선역사지리』, 1913년, 2쪽)
② 이마니시 류 ‘점제현비로 평양 낙랑군설 주장’
훗날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중심인물이 되는 이마니시 류(금서룡今西龍, 1875~1932년)가 가세했다. 그는 1910년 11월 전축분에서 출토된 ‘王○’가 생겨진 명문銘文을 낙랑군의 왕씨王氏와 연결시켜 낙랑군 유적이라고 주장했는데, 동경제국대학교 출신인 그의 주장은 이 지역을 낙랑군 치소로 바라보는 인식을 대거 확신시켰다. 이후 이마니시 류는 ‘신神의 손’이 된다.
1913년 그는 야스이 세이이치와 함께 평양 지역의 토성을 답사하던 중 ‘낙랑예관樂浪禮官’이라고 쓰인 와당과 ‘낙랑태수장樂浪太守長’이 새겨진 봉니 등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런 유물들이 발견된 것을 토대로 이 토성을 낙랑군 치소로 비정했다.
또한 이마니시는 같은 해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운평동(현재의 평안남도 온천군 성현리 어을동) 평양지대의 길옆에서 화강암으로 된 ‘점제현비’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 후 점제현비는 ‘점제현신사비’로 불리는데, ‘평산군신사비’라고도 한다. 점제현은 『한서』 「지리지」에 낙랑군에 속한 25개 현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지역이 낙랑군 점제현의 치소라는 것이 이마니시 류의 주장이었다. (이덕일,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43~44쪽)
결국 일본학자들의 결론은 문헌과 유물이 모두 ‘평양 대동강 = 낙랑군’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쓰다 소우키치는 낙랑군 아래 세웠다는 대방군을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로 비정했다.
이런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대한의 상고사의 끝자락인 단군조선의 중심지가 한반도 평양이 되었다. 산동반도에 있었던 연나라 국경과 맞닿아 있었던 단군조선은 어느 사이에 수천리를 후퇴해 지금 대동강 평양까지 밀려왔다. 만주지역의 요서, 요동에 있었던 단군조선 땅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다.
1차 사료와 유물이 보여주는 진실
그럼 과연 1차 사료들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문헌과 유물을 통시에 비교해 보며 결론을 도출해 보자.
우선 문헌들을 검토해 보자.
① 왕험성은 낙랑군의 패수 동쪽에 있다.
요동군 험독현: 응소應劭(후한 때 서기 2세기 무렵 인물)가, ‘조선 왕 위만의 도읍이다. 물이 험한 데 의지했으므로 험독險瀆이라 불렀다’고 했다. 신찬臣瓚은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의 패수 동쪽에 있다, 이로부터 험독이라 했다’고 했다. 안사고顏師古는 ‘신찬의 설이 옳다’고 했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
② 패수는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수경』 권14. 「패수」)
③ 낙랑 수성현은 갈석산이 있는 곳이다.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의 기점이다. (『사기』 「하夏본기」에 인용된 『태강지리지』의 주석)
우선 왕험성을 가기 위한 패수부터 검토해 보자. 현 교과서와 일제식민사학자들은 모두 한반도에 있는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을 패수로 비정했다. 그런데 고대 지나支那족의 역사지리서인 『한서』는 왕험성이 패수 동쪽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수경』은 패수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한마디로 패수는 한반도에 있는 강이 아니라는 소리인데 일제식민사관 추종자들은 한반도에 있는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을 패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강들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전부 1차 사료에 부합하지 않는 강이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도 위만이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조선에 망명했다고 기록했다. 만약 패수가 압록강이나 청천강, 대동강 등 한반도의 강이었다면, 위만이 ‘남쪽’으로 건넜다고 해야 한다. 1차 사료들은 동쪽으로 흘러들어가는 요서지역의 강들을 패수로 비정한다.
그럼 왕험성은 한반도 평양인가? 분명 사마천은 패수 동쪽에 왕험성이 있다고 했다. 식민사학자들의 주장대로 패수가 대동강이나 청천강이면 그 동쪽에 왕험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럼 강원도에 있어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북경 근처 갈석산 부근, 패수가 동쪽으로 흘러들어가는 요서遼西의 험준한 지역, 한 무제 공격을 1년 이상 막아낼 지형에 왕험성이 있었다.
그런데 일제 학자들은 패수, 왕험성뿐만 아니라 진시황의 만리장성까지 거짓말로 한반도로 끌어들였다. 자신이 1차 사료를 검토한 전문가인 양 포장한다. 그러나 모두 거짓이다.
진秦 장성의 동단은 지금의 조선 황해도 수안의 강역에서 기하여 대동강 상원으로 나와서 청천강을 끊고 서북으로 달려 압록강 및 동가강의 상원을 돌아서 개원 동북 지역으로 나온다는 사실은 『한서』 「지리지」에 의해서 의심할 바 없다. (이나바 이와기치, 「진장성동단秦長城東端 급及 왕험성고王險城考」 41쪽)
아니 어떻게 진나라 장성이 ‘청천강을 끊고 서북으로’ 달릴 수 있단 말인가. 강 위에 장성을 쌓는 재주를 진시황은 가졌다는 주장인가. 그리고 진시황은 갈석산까지밖에 순행을 하지 않았음이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인데 이를 일제 식민사학자는 가볍게 무시한다.
진시황은 북쪽과 남쪽, 그리고 서쪽의 자기가 개척한 영토의 끝까지 순행했다. 자기의 강토를 다 돌아다닌 풍습에 견주어 보면 진시황은 갈석산이 아닌 황해도까지 왔어야 말이 된다. 그러나 진시황이 황해도 수안까지 왔다는 기록, 한반도를 말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하여간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이런 엉터리 주장에 이덕일 교수는 “완전한 거짓말이다. 『한서』 「지리지」에는 황해도 수안은커녕 한반도에 대한 기술 자체가 전무하다. 『회남자」에서 유안이 말한 대로 한나라 사람들에게 동방의 끝은 갈석산이었고, 한반도에 대한 지식 자체가 없었다.”(『동아시아 고대사의 쟁점』 122쪽)고 잘라 말한다. 그러면서 같은 책에서 “사료적 근거가 없을수록 ‘의심할 것이 없다’, ‘재언을 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호도하는 것이 식민사학의 상투적 방법이다.”라고 꾸짖고 있다.
둘째, 유물을 검토해 보자.
① 평양 일대 한나라 와당 발견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의 토성동은 대동강 좌안左岸에 있는데, 사방 45정町의 지역에 흙으로 쌓은 성벽을 두른 유적의 자취가 뚜렷하다. 그 안팎에서 한나라 때 와당瓦當이 발견되었는데, 이와 같은 문양을 갖고 있는 기와 및 한漢·위魏 시대에 속하는 벽돌을 다수 발견했다. 또 그 부근에 낙랑군 시대의 고분군古墳群이 존재하는데, 이곳은 아마도 낙랑군치의 유적일 것이다. (1915년 조선총독부 발간 『조선고적도보』)
② 이마니시 류가 점제현비를 발굴하는 과정
“이마니시 류가 어을동 고분을 샅샅이 뒤졌으나 무늬 있는 와당은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면장에게 물으니 고비古碑가 하나 있지만 해독할 수 없으며, 해독하면 그 아래에 황금이 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였다. 다음 날에 가 탁본을 뜨고 해독하니 점제 두 글자가 있어 한대의 낙랑군 점제현과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후지타 료사쿠, 『조선고고학연구』, 1948)
조선총독부는 식민사학자들을 앞세워 평양 일대를 한 무제가 세운 한사군의 중심지 낙랑으로 비정되기를 원했고, 학자들은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결국 한나라 유물 발굴을 기정사실로 해서 평양 일대를 낙랑군으로 규정한다. 이런 발굴로 이마니시 류와 같은 식민사학자들의 명성은 더욱 높아 갔다. 패망 이후(1948년)에 집필된 조선총독부 고분조사위원이었던 후지타 료사쿠는 ‘이로써 천고千古의 의혹이 일시에 풀리게 된 것이다’(『조선고고학연구』)라고 칭송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제가 서로 칭송한 발언은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점제현신사비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일제의 역사조작은 역풍逆風을 맞은 것이다. 이제 역사에 관심을 가진 대한의 웬만한 사람이라면 이들의 조작을 알고 있다.
그럼 점제현신사비의 문제는 어떤 점이 있는가?
첫째, 이 비의 화강암은 주위 화강석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에서 측정한 결과 무려 2천2백만 ~ 2천8백만 년의 연대 차이가 난다고 한다. 또한 시멘트로 세워 놓았다고 한다. 연구 글을 보자.
“원래 육중한 비석을 세우자면 그 가공 수준이 높아야 한다. 그런데 점제비는 대충 다듬어졌으며 발굴 과정에서 드러난 비와 같이 기초에는 시멘트를 썼다.”(『조선고고연구』4호, 북한학자 김교경과 정강철 연구, 1995년)
이는 이마니시 류가 평양지역을 낙랑군으로 비정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가져와 세운 비석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어떻게 확 트인 평야지역에서 고려, 조선시대 1,000년 이상 아무도 찾지 못하던 비석이 갑자기 발굴될 수 있는가? 그리고 면장이 이야기했으면 면장을 세울 것이지 어린 꼬마를 비석 옆에 세워 놓고 기념사진을 찍었는지 의심스럽다. 이렇게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비굴한 방법까지 동원해 역사를 난도질하며 일제 식민사관을 주입시키려 한 것이다.
평양 일대 한나라 유물의 정체는?
그럼 평양 일대에서 나오는 한나라 유물은 무엇인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해 『삼국사기』 등에도 나오듯 고구려에 의해 잡혀온 많은 한나라 포로와 유민들의 유품으로 이해해야 한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위만조선과 한사군, 즉 전한前漢시대의 유물은 하나도 나온 것이 없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더욱이 최근 문성재 박사에 의해서 ‘세키노 다다시의 일기장’이 발견되면서 금서룡의 점제현신사비 사건을 능가하는 역풍逆風이 불고 있다. 그의 일기를 잠시 보자.
-대정 7년(1918) 3월 22일 맑음
오전에 죽촌 씨와 (북경)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샀다. 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한대漢代의 발굴물이 많아서, 낙랑 출토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했다.
二十二日晴午前, 竹村氏 瑠璃廠 往古玩購. 瑠璃廠 骨董鋪 比較的漢代 發掘物多, 浪出土品大抵皆在, 余極力之蒐集.
-대정 7년 3월 20일 맑음 북경
서협 씨의 소개로 중산용차 씨(지나 교통부 고문, 월후 출신)를 방문했다. 그의 소개로 우편국장 중림 씨를 방문하여 우편국 촉탁인 문학사 흑전간일 씨의 동료부터 유리창의 골동품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대의 발굴품을 300여 엔에 구입했다.
大正七年三月二十日晴北京 西脇氏ノ紹介二ヨリ中山龍次氏(支那交通部顧問, 越後 出身)ヲ訪ヒ 同氏ノ紹 介二ヨリ郵便局長中林(空白)氏 ヲ訪ヒ,郵便局囑託文學士黑田幹一ノ東道ニヨリ瑠璃廠ノ骨董店ヲ廻覽シ, 朝鮮總督府博物館ノ爲メ漢時ノ 發掘品ヲ三百餘円ヲ購フ.
1918년 세키노 다다시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대漢代, 즉 한사군에 관련된 유물, 왜곡에 사용될 유물(발굴품)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그럼 멀리 북경에서 사온 한나라 유물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다시의 고백처럼 이 유물은 조선총독부를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다. 평양 낙랑군설을 위한 발굴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추측일까? 실제로 일본학자들만 평양에 가면 ‘봉니, 와당’ 등 한대의 유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해방 후 북한 학자들이 발굴한 더 넓은 지역에서는 발굴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리고 세키노 다다시의 ‘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한대漢代의 발굴물이 많아서, 낙랑 출토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했다’는 말을 유념해서 봐야 한다. 북경 일대에 낙랑 출토품이 모두 갖추어져 있을 만큼 많았다는 것이다. 만일 일제의 주장처럼 평양이 낙랑군이었다면 북경 유리창까지 평양의 유물이 발이 달려서 갔단 말인가? 우리는 다다시의 말을 통해 북경일대가 낙랑군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지명과 유물을 옮기는 재주를 가진 일제가 옮기지 못한 산, 갈석산碣石山이 있는 곳 말이다.
이처럼 일제는 점제헌신사비와 봉니를 조작했음이 북한 연구자들의 발굴과 연구로 결론 내려졌다.
결국 꼬리가 길면 잡히듯 일제의 왜곡의 실체는 만천하에 드러나게 됐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출세욕과 금욕에 눈멀어 일본에 문물을 전해준 선생국 조선의 역사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1차 사료들과 유물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대동강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던 것이 아닌 한나라 포로와 유민들의 흔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1차 사료들은 모두 ‘갈석산’이 있는 북경 근처 하북성 지역을 왕험성이라 비정하고 있다.
또한 사마천의 『사기』의 험준한 왕험성에 의지해 1년을 한나라군과 싸웠다고 하는데 평양 일대에는 그런 지형이 없다. 그리고 수 문제의 공격 루트에는 분명 ‘낙랑을 통해 평양으로 집결하라’고 한다. 이를 통해 대동강 평양지역이 낙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잘못된 역사 물줄기를 바로 돌려놓아야
동북아는 여전히 역사전쟁 중이다. 100년 전 처참하게 9천 년 국통이 무너지고 일제 식민지가 되어 수백만이 죽었지만 여전히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역사 수업은 엉터리이고, 대한 사람들의 역사 방어는 허술하다. “역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역사가 밥 먹여주나요.”라는 이야기부터 “역사는 머리 아프고 재미없습니다. 역사학자들이 알아서 잘 해주겠지요.”라는 발언까지 제각각이다.
그러나 주변의 나라들은 더욱 역사 왜곡을 강화하는데 우리는 빗장을 풀고 멍하니 남 일 바라보듯 해서 되겠는가. 그런 방관자 의식이라면 역사전쟁의 승패는 이미 끝장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다행히 역사를 찾는 대한의 후예들이 있고, 그들에 의해 잘못된 역사왜곡의 문제들이 속속 밝혀지기에 큰 위안과 희망이 있다.
이제는 중화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이 잘못 돌려놓은 대한의 국통맥을 바로잡아야 한다. 1차 사료에도 없는 억지 주장으로 정리된 그들의 엉터리 교과서의 실체에 눈떠야 한다. 식민사관의 실체를 분명히 알고 엉뚱한 길로 돌려놓은 역사의 물줄기를 원래의 방향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역사를 잃은 자 모든 것을 잃는다. 역사를 찾는 자 모든 것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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