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스물여덟 번째로 큰 성씨인 백白씨는 우리나라에 38만 1천여 명이 살고 있다. 백白씨 중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원 백白씨’의 시조는 당나라 소주사람으로 신라 선덕왕 원년에 신라로 건너온 백우경이이다.
중국 백씨 성은 황제헌원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백우경이 중국 소주사람이므로 수원 백씨는 황제 헌원의 후손이다.
수원 백씨 시조 백우경白宇經
우리나라 백씨는 수원, 안동, 충주를 비롯하여 34본관이 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 백씨의 대부분은 수원 백씨에서 분파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수원 백씨의 시조는 백우경白宇經이다. 자는 경천擎天이고, 호는 송계松溪이며 당나라 소주蘇州사람이다. 백씨 성의 근원은 「만성통보萬姓統譜」에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황제지후차내중화백성지원야皇帝之後此乃中華白性之源也 시조송계공즉중화소주인이거동방始祖松鷄公卽中華蘇州人而居東方’ 이 글은 황제헌원의 후손이 중국 백씨성의 근원이며 시조 송계공은 곧 중국 소주 사람이 동방에 건너와 산 것이라는 뜻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백씨의 조상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황제 헌원軒轅이 된다. 또한 「제왕전승성원도帝王傳承姓源圖」를 보면 중국 백씨의 시조는 황제의 16세손 백을병白乙丙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시조 백우경과 백낙천은 사촌지간이라고 한다.
백우경은 인품이 고결하고 학문이 뛰어나 당나라 첨의사이부상서僉議事吏部尙書에 올랐다. 간신배들의 모함을 당하자 서기 780년(선덕왕 1년, 당나라 덕종 1년)에 당나라를 떠나 신라에 왔다. 경주 계림의 자옥산 아래에 정착하였다. 백우경이 신라 조정에서 누린 관작을 보면 조선시대 세종 때의 명신 황희가 지은 영락보 서문에 위지대상이라 명기하고 있으며, 기해대동보에도 “신라의 벼슬이 좌복야(부총리 격), 사공, 대사도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년에 계림鷄林 자옥산紫玉山(현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기슭에 영월당迎月堂과 만세암萬歲庵과 13층 석탑을 짓고 신라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어느 날 선덕왕이 이곳에 몸소 찾아와 영월당 현판에 경춘景春이라 쓰고 만세암을 정혜사로 고쳐주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정혜사의 불당은 없어지고 13층 석탑만이 남아 국보 4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우경은 당나라 황제가 여러 차례 돌아오라고 간청하였으나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서 살다가 영월당에서 일생을 마쳤는데 향년 73세였다. 묘는 실전되어 찾지 못하다가 후손들이 1965년에 자옥산 남쪽 기슭에서 시조의 묘를 찾는데 성공하였다. 1968년 음력 4월 8일에 첫 제향을 지내고 옥산세사로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향 수원의 역사
백씨의 관향 수원은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와 화성군 일대를 말한다. 이 지방은 원래 고구려의 매홀군買忽郡에 속했다가 신라 진흥왕 때 신라에 귀속되었으며 통일신라 시대인 경덕왕 때에는 수성隋城이라 칭했다. 고려 태조 때에는 수주水州로 승격되었으며 그후 수원水原이라 개칭되었다(수원도호부, 혹은 수원부). 그 뒤 조선조 세종 때 수성군隋城郡이라 불리었다. 중종 때 부府로 정조 때 유수부留守府로 승격되었으며, 해방 후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수원시를 제외한 나머지를 화성군華城郡으로 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해방 후에 수원시로 승격되었다.
백씨는 다음과 같은 근거에 따라 수원을 관향으로 삼고 있다. 첫째 시조 백우경의 증손인 백상白尙이 826년 한주漢州 태수太守(한주는 예전의 수원 지방)를 지냈으며, 둘째 시조의 5세손 백영白永이 한남 위례성에 살다가 우잠태수牛岑太守(우잠은 현 황해도 금천군)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셋째 중시조 백창직의 증손인 백휘白揮가 고려 목종조(서기 987년~1009년)에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으며, 넷째 중시조의 8세손인 백천장白天藏이 원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의 벼슬을 지내고 고려조 충선왕(서기 1309년~1314년)의 부름을 받고 돌아와 수원백水原伯으로 봉해졌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백씨는 중시조 이전부터 수원과 인연을 맺어 왔다고 보고 1996년 이후부터 관향을 수원으로 통일하여 족보를 편찬하고 있다.
중시조 백창직白昌稷
중시조 백창직의 자는 화숙和叔이며 시호는 영희英禧이다. 정확한 생존 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서기 870년대부터 서기 920년대 후반까지 생존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54대 경명왕(재위기간 917년~924년)의 부마였는데 공주가 일찍 타계하여 계비 진천 임씨를 맞이하여 장자 길吉과 차자 탁卓을 두었다. 무인이었으며 벼슬은 중랑장으로 경명왕조에 출사하였으며 고려조에도 진출하여 시중상장군에 증직되었다. 묘는 예천醴泉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전하지 못하다가 2012년 5월 3일 경상북도 예천군 유천면 고림리 212번지에 있는 고분(세칭 백장군 묘)을 중시조의 묘로 확정하였다. 매년 10월 첫 토요일을 제향일로 정하였다.
수원 백씨는 중시조 이후 29개의 파로 나누어졌는데 파명은 대개 파조의 호나 시호諡號에 따르지만 관직에 따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파명은 선정공파禪亭公派, 인주공파仁州公派, 오산군파鰲山君派, 장단공파長湍公派, 담암공파淡庵公派, 양곡공파陽谷公派, 태사공파太師公派, 정신재공파靜愼齋公派, 좌랑공파佐郞公派, 훈정공파訓正公派, 도승지공파都承旨公派, 참봉공파參奉公派, 별좌공파別坐公派, 문경공파文敬公派, 청산공파靑山公派, 산음공파山陰公派, 임피공파臨陂公派,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봉익대부공파奉翊大夫公派, 보공장군공파保功將軍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 금릉부원군파金陵府院君派, 함판공파咸判公派, 절제공파節制公派, 수의부위공파修義副尉公, 시랑공파侍郞公派, 동림공파東林公派, 부여군파扶餘君派, 문간공파文簡公派가 있다.
고려 시대의 인물
백길白吉
중시조의 장자로 자字는 태초太初요 신라 경순왕조敬順王朝(927~934)에 음보蔭補로 교위校尉를 지냈다. 930년(고려 태조 13) 8월 15일에 우릉도주芋陵島主(우릉도는 지금의 울릉도)의 명을 받아 토두土豆와 함께 고려에 사절로 가서 방물을 바쳤는데 이 덕분에 길은 정위正位, 토두는 정조正朝의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 길은 용력勇力이 뛰어나 태조 조에 정남대장군 광평시랑征南大將軍 廣評侍郞 벼슬을 지내고 혜종과 정종에 이르기까지 삼대왕을 섬기다가 서거하였다.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증직贈職 되었다.
백휘白揮
4세손으로 자는 경열慶悅, 호는 포주浦洲이며 시호諡號는 청헌淸獻이다. 16세에 등과하여 장원壯元으로 국자진사國字進士를 지내고 벼슬은 내봉감內奉監에 이르렀다. 고려 목종조穆宗朝(998~1009)에 대사마 대장군大司馬 大將軍으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으며 문종조文宗朝(1047~1082)에는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 공의 문학고행文學高行은 멀리 중국에까지 떨쳤다고 한다.
백간미白簡美
5세손으로 자는 신보愼甫, 호는 월곡月谷이며 시호諡號는 정민貞愍이다. 고려 성종조成宗朝(982~997)에 등과하여 벼슬이 광록대부 판병부사 감수국사겸 대장군보국사光祿大夫 判兵部事 監修國史兼 大將軍輔國事로 6대 국왕을 섬기고 노쇠하여 영해 전장寧海 田庄으로 돌아가 살았으며 97세에 서거하였다. 부음訃音이 조정에 전해지니 왕이 3일간이나 정무를 철폐하고 주육酒肉을 금하며 친히 분향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했다고 한다.
백이정白頤正
8세손으로 자는 약헌若軒, 호는 이재彝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안향의 문인으로 1275년(충렬왕 1) 문과에 급제했다. 1298년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10년간 머물면서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연구했고, 귀국할 때 정주程朱의 성리 서적과 주자의 <가례家禮>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뒤 후진양성에 힘을 써 이제현李齊賢·박충좌朴忠佐·이곡李穀·이인복李仁復·백문보白文寶 등 많은 문인을 배출했으며, 도학과 예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사람은 안향이지만,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체계를 파악하여 일가를 이룬 이로는 백이정을 든다. 남포의 신안원新安院, 충주의 도통사道統祠, 남해의 난곡사蘭谷祠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백장白莊
12세손으로 자는 명윤明允, 호는 정신재靜愼齋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정몽주에게 수업하여 16세에 진사가 되고 25세에 원나라에 과거科擧하여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를 지내고 공민왕 때에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고려가 멸망하자 강원도 원주 치악산으로 들어갔다. 태조 이성계가 그의 학식과 덕망을 높이 사 집현전 대제학을 제수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여 충남 서산군 해미로 유배를 갔다. 태종이 다시 이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등을 제수하며 그를 회유하였으나 “충신은 두 인군人君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번 시집가지 아니 하거늘 어찌 삼조三朝(세 임금을 말함) 식록食祿의 신하로서 두 마음을 두리요.”하며 거절하여 전라북도 장수현 임현내면 호덕동 위동位洞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장수현 장계長溪의 남쪽 유천柳川 언덕 위에 청심정淸心亭을 짓고, 학문 연마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방촌厖村 황희黃喜도 그곳으로 유배를 왔었는데 조석으로 그에게 문안 인사를 드릴 만큼, 그는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동방의 백이伯夷’라며 의정부영의정 겸 영중추부사議政府領議政兼領中樞府事 및 이부전서 보문각대제학吏部典書寶文閣大提學을 추증追贈하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조선 시대의 인물
백인걸白仁傑(1497~1579)
16세손으로 조광조의 문하인이었다. 153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에 오래 머무르다가 검열 예조좌랑, 남평현감, 호조정랑 등을 역임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윤원형 등 소윤의 미움을 사서 파면되고,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안변에 유배되었다. 1551년 풀려나와 윤원형이 죽자 복직, 1567년 71세의 나이로 교리가 되었다. 선조(1568~1608)때 직제학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으로 동지경연사 동지의금부사를 겸임, 다시 대사헌이 되어 권신들을 논핵하다기 사임했다. 1578년에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이듬해 동서분당의 폐단을 논하고 군비강화를 강조했다. 선조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학문에 뛰어났다.
백유양白惟讓(1530~1589)
17세손으로 조선의 문신이다. 1572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1581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이어 강원도어사江原道御使,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을 지내고 1588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이조참의吏曹參議, 1589년 병조참판, 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인자하였으며 사정邪正의 시비를 가려낼 때에는 의논이 강직하여 남에게 굴하지 않아서 명망이 두터웠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아들 수민壽民이 정여립의 형 여흥汝興의 딸을 아내로 삼았던 탓으로 연좌되어 사형을 당하자 사직하였다. 이어 서인西人으로부터 백인걸白仁傑· 백유함白惟咸 부자가 탄핵을 받자 부령에 유배, 장살杖殺되었다.
백유함白惟咸(1546~1618)
17세손으로 조선의 문신이다. 157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승문원주서承文院注書에 등용되고, 이어서 정자正字, 박사, 부수찬,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 1583년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584년 이조정랑이 되었다. 당쟁을 중재하던 이이가 죽자 그도 당쟁을 피하여 벼슬을 버리고 용안龍安(지금의 용인)의 농장에 내려가, 그곳에 있는 백운암에 들어가 교학敎學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평정되자 예조정랑으로 복직되었다. 1591년 왕세자 책봉문제로 서인인 정철鄭澈의 주장에 동조하다가, 정철이 물러나자 그도 경성으로 유배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가 풀려 직제학으로 복직되었다. 명나라 군사들의 군량을 조달하라는 특수임무를 부여받고 윤승훈과 함께 군량미 2만석을 조달하였고, 그 해 10월 성균관사성이 되어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직하였다. 1593년 함경도에서 왕자를 왜군에게 잡히게 한 황정욱黃廷彧을 탄핵하였다. 1594년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황주목사로 나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잘 어루만져 치적을 남겼다. 1596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광해군(1609~1622)초에 이이첨의 탄핵으로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1617년에 고향 용인에 방환放還되어 신원伸寃되었다. 그해 개성에서 죽었다.
백진남白振南(1564~1618)
자는 선명善鳴, 호는 송호松湖로 조선의 시인이다. 15세에 사학과시四學課試에 시부詩賦로써 뛰어난 실력을 보여 이이도 보고 이를 칭찬할 정도였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597년 정유재란 때 통제사 이순신의 진중으로 피란했다. 명나라 장군 계금피啓金皮, 승덕承德등이 그의 시를 보고 크게 찬탄했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왔을 때에 백의白衣로써 사신을 영접했다. 문장과 필법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주지번은 그의 필적을 보고는 절찬하며 소중히 간직했고, 주지번의 필적을 선사받기도 하는 등 서로 교의가 두터웠다.
백시구白時耉(1649∼1722)
20세손으로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자는 덕로德老,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1680년 무과에 급제하여 1684년 선전관이 되고, 1708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717년 함경도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이때에 기로소耆老所에 백금을 빌려준 일이 있는데 이 일로 반대파에 의하여 옥에 갇히고 문초를 받았다. 김일경, 목호룡睦虎龍 등에 의하여 신임사화가 일어날 때 이를 기화로 김창집金昌集의 죄상을 조작하려 할 때 그는 심문에 불복하였고 결국 고문에 못이겨 옥사하였다. 뒤에 1741년엔 영조가 임인옥안壬寅獄案을 불태우고 탕평책을 쓸 때에 그의 관직을 복구하고 몰수하였던 재산도 후손에게 돌려주었으며 호조판서를 추증하였다.
백성기白性基(1860∼1929)
29세손으로 조선 말기의 무신이다. 자는 효천孝天, 호는 소송小松이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에 남행선전관南行宣傳官으로 관로에 오르기 시작해서 같은 해 무과에 급제한 뒤 승선承宣, 철산부사鐵山府使, 내금위장內禁衛將,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경상좌도병마절도사, 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하였고, 1895년 갑오개혁 때는 참장參將에 임명된 뒤 군부협판, 갑산관찰사甲山觀察使, 평리원검사平理院檢事, 평리원재판장 및 군법기초위원을 지냈다. 독립협회 활동 시에는 개화파 무관의 한 사람이었으며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00년 군정교구軍政矯捄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는 고종이 원수부元帥府에 실시토록 영을 내려 일련의 군제정비가 이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육군법률 317조가 1900년 9월 제정되면서 육군법원이 설치되는 등 군사법제도가 완비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심역할을 한 이후 육군법원장, 원수부군무국총장, 기록국총장, 검사국총장, 평안북도관찰사, 교육부참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04년말 경무사警務使를 겸하고 있던 중 일제침략에 저항하는 상민배商民輩를 탄압하지 않았다고 하여 해임당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강제체결 때 민영환과 함께 극간하였으나 대세의 흐름이 돌이키기 어려운 것을 깨닫고 수원으로 퇴거하여 여생을 보냈다.
(영상 24분1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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