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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B상생방송/한국의 성씨

한국의 성씨 (27회) - 문화 류씨

by 가가운장 2024. 3. 9.

우리나라에서 열 아홉 번째로 큰 성씨가 류柳씨인데 이 중 문화 류씨는 가장 큰 본관이다. 문화 류씨 시조 대승공 류차달은 황해도 유주儒州 태생으로 고려 개국에 큰 공을 세워 대승의 관직과 삼한공신의 훈호를 받았다. 유주儒州는 고려 초,중기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을 부르던 지명으로 9세손 류경이 최씨 무신정권을 종식시키고 문을 회복했다고 하여 고려 고종 46년 류경의 고향 유주를 문화로 개칭해 하사한 이후 문화 류씨의 본관이 되었다. 문화 류씨는 고려 때 4대 명족, 조선 때 8대성으로 일컬어왔다.

 

우리나라의 류씨

문화 류씨 시조 류차달

문화류씨통사에 의하면 문화 류씨가 국사國史나 공가문헌公家文獻에 처음 등재된 것은 고려사高麗史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라고 한다.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문간공文簡公 류공권柳公權의 주공의 6세조 류차달柳車達은 고려 태조의 개국을 도와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관직은 대승大丞이었다.”고 하였다.

 

대승은 고려 초기의 관계로 고려의 제도가 정비되기 전에 문, 무관에게 수여되었으며, 고려 16관계 중 5위에 해당하였고 서기 995년 문, 무의 관계를 나눌 때 흥록대부興祿大夫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이 호칭은 향직 3품으로 존속, 비관인층과 지방 호족들에게 수여되었다. ‘동국여지승람의 황해도 문화현의 인물편에 류차달은 고려 태조가 남방을 정벌할 때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공급함으로써 그 공으로 고려 태조가 대승에 제수함과 아울러 삼한공신으로 사호賜號하였다.”고 하였으며 배위配位 김씨는 경주김씨(신라 김씨) 도시조대보공 김알지의 후손 김균의 딸로 아들인 좌윤佐尹 효금孝金을 두었다.

 

류차달의 아들인 좌윤 효금이 구월산九月山을 유람하다가 호랑이를 만나 입속에 걸려 있던 비녀를 빼줘 그 음덕으로 자손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리라고 산신이 현몽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고 좌윤공의 5세손 문간공 류공권 이하 수대數代의 사행事行이 기록되어 있다.

 

류씨는 2000년 기준으로 남한에 60만여 명, 56개의 본이 존재한다. 이중 문화 류씨가 28만여 명으로 대종을 이루고 있고 그 다음으로 전주, 진주, 고흥, 강릉, 서산, 풍산이 10,000명이 넘는 본이다. 전에는 모든 류씨는 문화류씨의 분파로 믿어지기도 했으나, 현재는 본에 따라 경우가 다르다는 의견도 대두되고 있다. 또 한동안 류씨와 차씨가 뿌리가 같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나 현재 문화 류씨 측에서는 이를 위서僞書에 근거를 둔 잘못된 사실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관향 문화文化의 역사

문화文化는 황해도에 있는 지명으로 서울에서 48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상 황해남도 신천군과 삼천군에 걸친 일대인데, 그 지역은 고구려 때 궐구현闕口縣, 고려초에 유주儒州 등의 명칭 변경이 있다가, 고려 고종 때 문화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문화현으로 존속시켜 오다가 1895(고종 32)에 군으로 되었고, 그 이후 신천군信川郡에 병합되어 문화면이 되었다.

 

1952년에는 삼천군이 신설되면서 절반 정도가 삼천군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초에 유주로서 주로 승격된 것이 류차달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류경柳璥은 고려 고종 45년인 1258년 무신정권을 이어가던 최의를 제거하고 왕권을 왕실에 반환하여 나라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이듬해 나라에서는 유주를 그의 고향이라 하여 문화로 바꾸고 현으로 승격시켜 보답을 표시했다.

 

황해도 구월산(953m) 정상에서 동남쪽 40리 평지에 문화현이 있었다. 구월산은 북한의 5대 명산 중 하나이고 황해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구월산 남쪽 산록에 대승공 류차달의 묘소가 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류릉柳陵으로 불리며 전에는 절이었다가 재실齋室로 변한 묵방재라는 건물이 묘소의 아래에 있다고 한다.

 

성씨의 변천과정

고려 시대의 인물

문화 류씨의 분파는 고려 말, 조선 초에 활약한 인물들인 류차달의 11, 13, 14세손을 파조로 하여 15개 파로 나누어진다. 7세손 류공권柳公權에게는 류언침柳彥沉, 류택柳澤의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후손을 각각 갑, 파라 한다.

 

문간공 류공권은 의종 14년 등과 후 명종 때에 추밀원사, 정당문학을 지냈으며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명신이다. 큰 아들 류언침은 예부상서판각문사, 둘째 아들 류택은 좌복사左僕射를 거쳐 한림학사翰林學士承旨를 지냈다. 류경柳璥은 몽고가 고려를 침입하고, 고려가 원에 항복하여 그 지배를 받게 된 고종, 원종조에 걸친 시기에 활동한 재상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 대사성에 올랐다.

 

당시는 최씨 무인정권기로서 최의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1258년 류경은 김준 등과 협력,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왕에게 돌렸다. 이 공으로 상장군에 올랐으며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등을 역임했다. 1270년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에서 반란군에게 잡혔으나 극적으로 탈출했다. 평장사판병부사平章事判兵部事, 첨의시랑찬성僉議侍郞贊成, 첨의중찬僉議中贊 등을 역임했다.

 

문장이 뛰어나 신종神宗, 희종熙宗, 강종康宗, 고종高宗 4대의 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존비, 안향 등 많은 학자가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류승柳陞은 류경의 아들로 충렬왕 17년 고려에 침입해 온 합단적哈丹賊을 격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뒤에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에 이르렀다. 통례문通禮門에 오래 종사하면서 조정의 의례에 자세한 해설을 붙인 신의新儀를 편찬했다.

 

류만수柳曼殊, 류관柳寬, 류량柳亮은 고려 말에 관직에 나아갔는데, 역성 혁명기에 조선 개국 세력에 협력하여 개국공신이 되고, 재상에까지 올라 조선조에서 문화 류씨의 기반을 확고히 한 인물들이다. 류만수는 공민왕 때 보마배행수寶馬陪行首가 되고, 전법판서典法判書를 거쳐 우 왕조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웠다. 우왕 14년 요동정벌군 장수로 출전했다가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 그 공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었다. 공양왕 2년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가 되어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을 겸했으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다음해 회군공신回軍功臣 1등에 추록되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에 승진했다. 태조 7년 이성계의 계승자를 둘러싸고 왕자들 간에 싸움이 일어났을 때, 이방원 측에 의해 정도전 등과 함께 참살되었다.

 

유관은 공민왕 20년 문과에 급제, 이성계의 개국에 협조하여 조선 개국 후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다. 대사성大司成, 형조刑曹, 이조전서吏曹典書를 지내고, 태종 초에 대사헌大司憲, 계림부윤鷄林府尹을 역임했다. 1409년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직, 다음해 태조실록편찬에 참여했다. 1421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1424년 우의정에 승진하여 고려사를 수정했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학문에 뛰어나고 시문에 능했다. 울타리도 없는 초가에 살면서 비가 새자 우산을 받고 앉아 우산없는 사람을 걱정했다는 일화가 청백리의 귀감으로 전해온다. 그의 아들이 태종 조에 형조판서를 지낸 류계문柳季聞이다.

 

류형은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 전의부령典儀副令, 형조전서刑曹典書를 지냈다. 1392년 이조전서로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에 봉해지고, 정종 2년 참지삼군부사參知三軍府事, 다음해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문성군에 봉해졌다. 예문관대제학,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 겸 대사헌을 역임하고, 1413년 부원군에 진봉進封, 1415년 우의정에 이르렀다.

 

조선 시대의 인물

류양의 5대손인 충숙공 류권柳權은 인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인종이 승하한 후에는 원상으로 서정庶政을 맡았으나, 명종 즉위 후 외척인 파평 윤씨 진영에서 벌어진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정권쟁탈 소용돌이에 휘말려 유배된 후 사사되었다.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하는데, 이때 이조판서 류인숙(보주류씨), 대사간 류감(전주류씨), 이조참판 류희춘(선산류씨), 대사간 류경심(풍산류씨) 등도 파직당하고, 유배 받는 등 류씨 집안에 큰 화가 미쳤다.

 

임진왜란 때는 충경공의 부윤공파인 문흥군 류사원柳思瑗이 청병을 위해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와 선무공신에 책록되었다.

 

좌상공파의 파조 류만수의 손자에서는 단종 때 청난공신인 류숙柳淑(판서), 류수柳洙(찬성), 류사柳泗(판서) 3명의 공신이 나왔으며, 현손인 문희공 류순柳洵은 세조 때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연산군 때 영의정을 지내다가 중종반정 이후 공신에 책록되고 문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류순의 아들인 류응룡柳應龍은 중종반정의 공신으로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6대손인 문정공 류전柳琠은 명종 때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호당을 거쳐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후에 평난공신 2등에 책록되고 시녕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그외 안양공 류수柳洙는 성종 때 좌리공신에 책록되고 문성군에 봉해졌다. 류만수의 사촌이면서 정숙공파조인 류연현柳延顯은 태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하정공파의 파조인 문간공 류관의 둘째 아들 류계문柳季聞은 세종 때 병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류계문의 손자 류담년柳聃年도 중종 때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실학자이며 토지개혁과 경제혁신을 주장한 반계수록磻溪隧錄의 저자인 류형원은 류계문의 8대손이다. 그의 9대손인 충간공 류상운柳尙運은 숙종 때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고, 대사간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을 두 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세 번 역임하였다. 하지만 장희빈 폐위에 얽힌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파직되었다. 그의 아들 만암 류봉휘柳鳳輝는 영조 때 영의정을 역임하였는데, 소론 측의 입장에서 영조의 책봉을 반대하여, 노론을 실각시켰으나, 사화를 일으킨 주모자로 노론의 공격을 받아 영의정에서 면직되고, 경흥에 유배되어 죽었다.

 

그 외 기후사공파에서는 사육신 중의 한사람인 충경공 류성원柳誠源, 실학자 류득공柳得恭이 있다. 이외에도 박연과 함께 아악의 기초를 세운 문숙공 류사눌柳思訥, 임진왜란 때 공경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류팽노柳彭老, 정조 때 기정진 등과 함께 이름난 유학자인 류대원柳大遠 등이 있다. 문화류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니, 134인이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음사蔭仕를 포함 실직당상관이 90여 인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 상신相臣 9, 호당湖堂 5, 청백리淸白吏 4, 공신功臣 11인 등이 배출되었다. 시호諡號22장이 내렸는데, 그 중에 문시文諡7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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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26분0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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