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 년 전 지금의 제주도인 탐라에 아무도 살지 않을 때 모흥이라는 곳에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삼신三神이 솟아 나왔다. 이들은 각각 고高. 양梁. 부夫씨의 시조가 되는데 고을나는 탐라국의 초대 왕으로 제주 고씨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이후 제주 고씨는 고을나왕을 비롯하여 탐라 왕국 시대의 45명의 왕과 탐라 성주 시대의 17명의 성주가 세습 통치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고씨
고씨는 두 계통이 있다. 대부분의 고씨는 고을라를 시조로 삼고 있는 ‘제주 고씨’ 계통이고, 그 외에는 고구려 동명성왕을 시조로 하는 고구려 계통의 ‘횡성 고씨’이다. 두 성씨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성씨다. 제주 고씨에서 분적한 횡성 고씨가 있어 일반적으로 횡성 고씨(고구려 계통)는 한자를 고高 자로, 제주 고씨가 고髙 자를 써서 서로 구별한다. 제주 고씨 계통은 제주가 대종大宗이며 장흥長興, 개성開城, 연안延安, 용담龍潭, 담양潭陽, 의령宜寧, 고봉高峰, 옥구沃溝, 상당上黨(청주), 김화金化, 토산兎山, 회령會寧, 안동安東 등 10여 본이 문헌에 전한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제주 고씨 중앙종문회〉를 만들어 하나로 합본되어 파로 불리고 있다. 예를 들어, 장흥을 본관으로 하는 장흥 고씨는 제주 고씨 장흥백파로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횡성橫城 고씨高氏의 시조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藏王(이름:고장高藏)의 아들인 고인승高仁承이다. 그는 고구려 부흥운동 때 왕에 추대된 고안승高安勝의 형이기도 하다. 횡성 고씨 족보에 의하면 보장왕의 아들로 명승, 인승, 덕승, 안승이 있다. 이중 고인승의 12세손 고민후高旻厚가 강원도 횡성에 정착하면서 횡성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횡성 고씨는 강원도 횡성을 비롯하여 원주, 제천 등 강원도 일원에 4만여 명이 살고 있다. 이 밖에 중국 요령성에는 고구려 장수왕의 후손들인 요양遼陽 고씨가 살고 있고 일본에는 고구려 왕족인 현무약광을 중시조로 하는 고마高마씨가 살고 있다. 결국 이들은 모두 고구려를 개국한 시조 고주몽의 후손들이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고씨의 전체 인구는 43만 5839명으로 집계되었는데, 그중 제주고씨가 32만여 명, 장흥 고씨가 6만여 명, 횡성 고씨가 4천여 명 등이다.
시조 고을라髙乙羅와 삼성혈 전설
제주 고씨는 고을라髙乙羅를 시조로 한다. 시조의 탄생에 대해 제주도에는 삼성혈三姓穴 전설이 유명하다. 동국여지승람과 고려사에 의하면 오늘날 제주도인 탐라국에는 처음에는 만물과 사람이 없었는데 삼신인三神人 즉 고을라高乙那·부을라夫乙那·양을라良乙那가 한라산 북쪽에서 솟아나왔다고 한다. 고려사에 “...이들 3신은 수렵을 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동쪽 바다에 자주색 흙으로 봉한 나무 궤짝이 떠 내려와 건져 열어보니 일본국日本國에서 왔다는 푸른 띠를 맨 사자使者가 푸른 옷을 입은 아름다운 세 공주를 데리고 나왔다. 3신인이 각각 이 공주들과 혼인하고 이들이 가지고 온 오곡五穀 종자의 씨앗과 송아지, 망아지로 목축과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탐라국의 지배씨족이 되어 태평성대를 이루며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제주도에서는 이들 세 신인이 솟아났다는 삼성혈과 나무 궤짝이 발견된 황루알 해안, 세 공주와 혼인한 혼인지婚姻池, 활을 쏘아 영지를 나눴다는 삼사석三射石 등이 남아 있다.
일본국은 신화적인 용어로 구체적인 국명이라기보다는 ‘해가 뜨는 나라’로 이해된다. 조선시대 시문선집인 ‘동문선(東文選)’의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에서는 세 공주의 출신지가 이어도, 벌랑, 벽랑국碧浪國에서 온 것으로 돼 있다. 벽랑국 또는 벌랑은 파도치는 땅, 파도가 높은 지역을 일컫는다. 세 공주가 이어도 해역을 항해하여 왔을 가능성이 있다.
탐라의 역사
탐라국耽羅國은 제주도에 세워진 고대 왕국으로써 삼국시대에는 구한九韓 중 네 번째 되는 나라로 불릴 만큼 번성하였다. 「영주지瀛洲誌」에 탐라의 개국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삼신인이 인간세계를 이루고 9백년이 지난 뒤에 인심이 고씨髙氏에게 모아지니 임금이 되어 탁라국乇羅國을 세웠다(厥後九伯年之後 人心咸歸髙氏 以髙爲君國號乇羅)’이로 볼 때 처음 삼성의 씨족 사회에서 집단이 점점 커지면서 나라를 세울 때 고씨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탐라의 건국연대에 관하여는 시조 고을나왕髙乙那王이 인간세계를 이룩한 후 9백년이 지났다고 하였을 뿐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다. 「탐라국왕세기耽羅國王世紀」에 의하면 기원전 2337년경에 탐라국을 건국하였다 한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백제 문주왕 2년에 탐라국 사자를 임명하였고, 동성왕 20년(498)에는 탐라가 백제에 공부貢賦를 보내지 않는다고 공략하려고 하였더니 탐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가 망한 다음 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탐라국주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한다. 탐라국 왕이 백제의 좌평 벼슬을 겸한 것이다.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탐라는 독립된 소국으로서 신라나 백제에 조공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탐라국은 고을라 이후 고려 태조 21년(938) 45세 자수왕自堅王때 태자 고말노高末老가 조공하였다. 이에 태조는 성주星主, 왕자王子의 작을 주었다 한다. 탐라는 고려 숙종 10년 이후 고려의 지방군현으로 편입되었다. 충렬왕 시기에 한때 고려의 영역에서 빼앗겨 원의 직할령이 된 적이 있고, 고려에 반환된 후에 1295년(충렬왕 21년) 비로소 중앙정부의 관리가 파견되었다.
성씨의 변천과정
중시조 고말로髙末老
고말로는 시조 고을나의 46세손이며 탐라의 마지막 군주인 45세 고자수髙自堅왕의 태자太子이다. 천성이 고결高潔하고 영민靈敏하여 덕망이 높았다고 한다. 935년에 태조 왕건이 신라와 후백제를 정복한 다음 그 여세로서 탐라국도 강제로 예속隸屬하려 하였다. 고자수는 사신을 보내 화친을 꾀하려 했으나 대세에 눌리어 굴복하고 말았으니 938년에 태자太子인 공을 고려에 입조入朝케 하였다. 이에 고려 태조는 탐라국의 오랜 왕통을 존중히 여겨 접대하는 범절을 임금과 같게 하여 각별히 예우禮遇하고 공에게 성주星主, 왕자王子의 작호를 제수除授하였으며 그 작위를 대대로 직계直系 후손後孫에게 세습케 하였다(太祖 二十一年 冬十二月 眈羅國太子 末老來朝 賜 星主, 王子 爵-「고려사」).
고려 태조는 탐라국의 지리적, 역사적 특수성을 참작하여 왕의 칭호 대신 성주라 칭하게 하였을 뿐 계속 자치국自治國으로 인정하였다. 이로부터 말로가 탐라의 제1대 성주가 되어 다스렸다. 탐라는 오랜 왕치국王治國으로 내려오는 동안 신라, 고구려, 백제, 당, 일본 등 제국과 교역交易이 빈번하여짐에 따라 도읍지都邑地인 칠성대촌七星大村(지금의 제주시)은 탐라국의 관문이며 중심지로서 자연히 번성해졌다. 말로는 탐라성주眈羅星主로서 토산물의 생산을 장려하고 고려와 교빙交聘하는 한편 송宋, 일본 등과 교역하였다.
그후 목종穆宗 때인 1002년(임인壬寅)과 1007년(정미丁未) 두 차례에 걸쳐서 탐라의 화산폭발로 5, 6일 동안이나 한라산 용암이 분출하고 운무雲霧가 하늘을 가리워 밤과 같았으며 지동地動은 우뢰와 같았다. 이때 해중海中에서 비양도飛揚島와 군산軍山이 솟아 나왔다. 이때 목종은 태학 박사인 전공지田拱之를 탐라에 보내어 화산폭발로 인한 인명 및 재산의 피해 상황과 해중에서 새로 솟아난 섬들의 지형도를 그려 조사케 하였다. 현종顯宗 2년(1011)에 공은 고려 왕으로부터 주기朱記(주인朱印)를 받아 이를 성주 직분의 증표證票로 삼았다고 한다. 탐라는 섬나라로서 일찍이 배를 만들고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였고 한라산에는 재목이 풍부하였으므로 다음 해 대선大船 1척을 만들어 고려에 보냈다. 현종 10년(1019)에 공은 수행원을 대동하고 송宋, 흑수국黑水國 사신과 함께 고려 개경에 입경하여 왕궁에서 베푼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후 현종 13년(1022)에 공은 노쇠한 몸이 되니 셋째 아들인 소紹를 사자와 함께 고려에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다.
말로에게는 고유高維·고강高綱·고소高紹 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등과登科함으로써 가문이 번창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특히 장자 고유는 고려 문종 때 우복야右僕射에 올라 고려에 벼슬한 최초의 탐라인이 되었다. 이후로 고려시대에 제주 고씨에서는 9상서尙書, 12한림翰林을 배출하였다. 장남 유維가 성주작星主爵을 계승하였다. 말로가 탐라국 태자로서 처음으로 고려에 입조하여 성주작星主爵을 받았으므로 그를 제주 고씨濟州髙氏의 중시조 일세一世로 삼고 있다.
제주 고씨는 고말로의 증손인 고영신髙令臣 때부터 20여 파로 나뉜다. 제주고씨 영곡공파靈谷公派, 장흥 고씨 장흥백파長興伯派, 옥구 고씨 문충공파文忠公派, 개성 고씨 양경공파良敬公派, 청주 고씨 상당군파上黨君派, 제주 고씨 성주공파星主公派, 제주 고씨 전서공파典書公派, 횡성 고씨 화전군파花田君派 등이 있다. 그중 영곡공파 후손이 가장 많아 오늘날 제주 고씨의 5분의 1을 차지한다.
조선 시대의 인물
조선 초기의 인물로는 고득종高得宗이 있다. 그는 세종 9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참의禮曺參議, 한성판윤漢城判尹,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는데, 명나라에 두 차례, 일본에 한 차례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외교에 활약이 많았다. 제주의 향교를 중심으로 유학 진흥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사후 문충공文忠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고태필高台弼, 고태정高台鼎, 고태보高台輔, 고태익高台翼 등 네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 전성시대를 누렸다. 고태필은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겸 황해도관찰사를 지내고 첨지중추부사, 한성부좌윤에 이르렀다.
고려高呂는 여말선초 이성계 휘하에서 조선 개국에 참여,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된 인물로 고성부원군高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정적을 숙청한 포은 정몽주 살해에 행동대로 직접 가담하였다.
고형산高荊山은 연산군 때 해주목사와 병마절도사를 거쳐 중종반정 후에는 형조, 호조, 병조판서를 두루 역임한 뒤 우찬성에 올랐다. 고희高曦는 선조 17년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 군기주부軍器主簿, 도총경력都摠經歷, 훈련판관訓練判官, 군기첨정軍器僉正 및 여러 지방 군수, 부사를 역임한 후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조선조의 인물로 누구보다 이름을 드러낸 사람은 임란 때 3부자父子가 의병을 일으켜 순국한 고경명高敬命과 그의 아들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다. 고경명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58년 왕이 직접 성균관에 나와 실시한 시험에서 수석으로 급제하였고, 같은 해 다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호조좌랑戶曹佐郞, 전리典吏, 정언正言, 교리校理를 지내고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를 거쳐 동래부사가 되었다. 동래부사로 있다가 귀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당시 그는 60세의 노인이었다. 둘째 아들 고인후도 함께 순절했는데 그 자리에 없어 살아남은 큰 아들 고종후도 ‘복수의병장’으로 다시 나가 진주성 싸움에 참가했다. 나중에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최경희 등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나라에서는 고경명을 숭정대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예문관 대제학에 추증하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광주光州에 고경명과 종후, 인후 3부자를 기리는 포충사褒忠祠를 지어 충절을 기렸다. 고경명의 큰아들 고종후는 효열孝烈, 둘째 고인후에게는 의열義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경명의 두 딸인 노씨 부인과 안씨 부인도 정유재란 때 왜적을 꾸짖으며 칼을 안고 엎드려 순절하였으며, 손자인 고부립高傅立도 정묘호란 때 의병장이었다.
제주 고씨는 조선시대에 문과에 56명, 무과에 81명, 사마시에 56명, 역과에 38명, 의과에 6명, 음양과에 2명, 율과에 9명 등 총 227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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